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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irby Jun 15. 2024

와인 페어링 말고, 주스 페어링

La degustation in Prague, 2023

저는 해외에 나가면, 가능하면 그 도시의 미슐랭 레스토랑에 방문해 보려고 합니다.


물론, 미슐랭 레스토랑이라고 해서 100% 제 입맛에 맞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그 나라 혹은 도시의 식문화를 대표한다고도 할 수 없습니다. (서울의 한식 미슐랭 레스토랑들을 생각해 보면, 한식의 전통에 기반한 멋진 요리들이 나오지만 그 요리들이 현대 한국인의 식문화를 대변한다고 하기는 어려운 것처럼요.)


하지만, 이왕이면 관광객이 즐비한 식당보다는 현지의 정말 맛있는 식당에 가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인 것 같습니다. 사실 영 입에 맞지 않아도, 그 음식이 정말 현지 사람들의 일상적인 식사인데 입에 맞지 않는 것이라면 그도 하나의 경험이 되겠지요. 하지만 대충 만든 관광지 음식이라 입맛에 맞지 않는 것이라면 아무런 경험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안내자 없는 관광객 입장에서는 여러 정보들을 보고 선택해야 하는데, 그러다 보니 그나마 믿을만한 정보라고 생각되는 미슐랭 가이드에 의지하게 됩니다. 이번 프라하 여행에서는 총 두 번의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는데요, 한 번은 야경 투어 때문에 간단히 케밥을 먹고, 다른 한 끼는 프라하 현지에서도 유명한 식당이라는 'La degustation boheme bourgeoise' 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프라하의 두 곳 있는 미슐랭 1스타 레스토랑 중 한 곳입니다.




서울에도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보통 스타를 받은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하려면, 음식의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인당 최소 20만원 정도는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오늘 주제인 'la degustation'은 프라하의 물가를 감안하지 않는다면 상대적으로 저렴한 편입니다. 제가 방문했을 당시(2023년) 저녁 5코스 메뉴가 2450코루나, 우리 돈으로 15만원 정도였거든요. 점심에는 훨씬 더 저렴한 3코스 메뉴가 준비됩니다.


다만, 유럽의 고급 레스토랑은 저녁 식사 시간이 서너시간씩 걸리는 경우도 많은데, 이 식당은 식사 시간을 두 시간 정도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저녁 시간에도 소위 2부제를 한다는 느낌인데요. 와인 마시며 천천히 대화하는 서유럽 식당의 저녁 분위기와는 사뭇 다릅니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시간이 금인 관광객 입장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격에는 더 맞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6시나 7시쯤 방문하신 다음, 야경을 즐기면 딱 좋은 관광 코스가 아닐까 싶습니다.

내부 인테리어 등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화려하지 않고, 식사를 즐기는 현지인들의 옷차림도 과하게 차려입었다는 느낌이 없습니다. 유럽의 일부 레스토랑들은 엄격하게 드레스 코드를 요구하는 경우가 있는데요, 이러한 코스 위주의 식사가 과거 귀족 문화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식당들은 자켓을 입지 않은 손님에게 자켓을 빌려주기도 한다고 하죠. 프라하에서 이름 높은 식당이라고 하지만, 현지인들은 상대적으로 가벼운 옷차림이었습니다. 조명의 화려한 뼈다귀 모양 장식이 인상적이네요.



지난 번 글에서도 적었지만, 체코는 바다가 없는 내륙국가입니다. 대부분의 국토가 산지와 숲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해산물을 접하기 어려운 나라였습니다. 대신 다양한 육류와 임산물을 취할 수 있어 그 방면으로 요리가 발달했다고 하죠. 이 식당도 체코의 전통 요리에서 유래한 음식들을 선보인다고 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육류나 임산물의 비중이 높을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또한, 다양한 계절의 변화를 식사에 반영한다고 하는데요, 미슐랭 가이드는 이러한 계절감이 있는 음식에 대한 평가가 후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 사계절이 뚜렷하여 계절별로 주요 메뉴가 휙휙 바뀌는 한식에 익숙하다면, 계절에 따라 음식이 바뀌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만요. 그만큼 제철 재료를 사용하는 것을 중요시한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녁 식사는 다섯 가지 테이스팅 메뉴로 준비됩니다.

오이, 송어, 치킨, 소고기, 블루베리 디저트인데요. 이렇게 요리의 이름을 쓰지 않고 재료를 나열하는 것은 이런 식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김치찌개' 라고 쓰지 않고, '김치, 돼지고기, 두부, 파' 정도 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사실, 이렇게 재료를 나열하여 메뉴를 쓰는 것은 기존에 정형화되어 있는 요리가 아닌, 그 식당 혹은 셰프가 만들어 낸 독창적인 요리를 낼 것이고, 그 요리의 맛을 추측하기 쉽도록 이렇게 재료를 나열하는 것에서 출발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상적인 것은 와인 페어링 외에 주스 페어링이 같이 준비되어 있는 점이었는데요. 사실 와인 페어링 또는 와인을 곁들이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문화라 술을 못하는 저로서는 아쉬운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예 와인을 곁들일 것을 전제하고 간을 한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었거든요. 주스도 기성품이 아닌, 음식과 맞추어 식당에서 직접 만드는 것이라 하여 기대를 가지고 같이 주문했습니다.



메뉴에 포함되지 않은, 간단한 음식이 먼저 나옵니다. 총 세 가지가 나왔는데요, 식사 전 가볍게 입맛을 돋우는 작은 요리들입니다. 사실 저는 이 첫 순서에 기대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아무래도 가장 틀이 잡히지 않은 메뉴들이 나오는지라, 창의성과 새로움을 엿보기 좋은 순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각각 작은 타르타르와 제철 야채, 그리고 독특하게 향신료를 접시에 담아 가져왔는데요, 맛있으면 핥아 먹어도 괜찮다는 스몰 토크와 함께 준비되었습니다. 당연히 정말 핥아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포크로 걷어내듯 먹으면 됩니다. 비프 타르타르는 손으로 집어 먹기 좋게 햄버거 번 마냥 칩 사이에 끼워 나왔습니다. 양념되지 않은 육회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 그래서 더욱 고기의 감칠맛이 잘 느껴집니다. 겉면의 칩은 바삭한 식감이 좋았구요. 옆에 마카롱같이 생긴 작은 것은 속 안에 페이스트 형태의 간을 넣었습니다. 정말 딱 순대 간 부드럽게 만든 느낌입니다. 제철 야채들은 살짝 같이 된 느낌인데, 의외로 생 야채를 잘 먹지 않는 것 같은 유럽인들에게는 독특한 인상을 줄 것 같습니다. 가장 독특한 메뉴였던 향신료는 트러플 맛, 매콤한 맛 등 여러 맛이 납니다. 전반적으로 다양한 미각을 한번씩 건드리는 느낌입니다.



이 날의 식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주스 페어링입니다. 다섯 가지 코스에 맞추어 역시 다섯 가지 주스가 같이 준비되었는데요, 첫 번째 주스는 루바브를 활용하여 만든 주스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접하기 어려운 식재료로, 주로 영양제 등에 쓰는 모양입니다.


같이 곁들인 것은 오이. 윗 부분에 아몬드 등 견과류와 크리미한 소스를 올렸습니다. 먹기 좋게 잘라져 있어 포크로 찍어 먹으면 되는데요, 고소한 견과류가 맛의 포인트를 잘 살려내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신 맛과 단 맛이 강하지 않고 아주 은은한 피클 같은 느낌도 있는데요, 생각해 보면 이 오이 자체의 맛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고, 아몬드도 특별한 식재료가 아닌데 두 개의 조합이 생각보다 좋은 맛을 냅니다.



요리가 나오기 전에 이렇게 주스를 먼저 가져다 주는데요, 의외로 토마토 주스입니다. 색과 잘 매치되지 않는데요, 토마토 콘소메 같은 느낌을 줍니다. 껍질을 벗겨낸 토마토를 가라앉혀서 만들었다고 하는데요, 색은 빨갛지 않지만 향이 워낙 강렬해서 설명해 주지 않아도 토마토 주스구나 하고 알 수 있을 정도입니다. 대저토마토와 유사한 맛이라고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다음 요리는 송어입니다. 송어는 민물 생선이라 바다는 없어도 강은 있는 체코에서도 과거부터 접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되는 생선입니다. 개인적으로 송어에 대해서는 그렇게 즐거운 기억은 없어 약간 걱정했는데요, 이 곳의 송어요리는 정말 맛있었습니다. 송어에 서양 무인 래디쉬와 토마토, 마요네즈를 곁들였는데요, 얇게 저며 올린 래디쉬의 아삭한 식감이 묘하게 단무지같다 싶으면서도 전체적인 요리의 맛을 더 끌어올려주는 느낌이 듭니다. 마치 과일에 소금을 살짝 뿌리면 단 맛이 확 살아나는 것처럼요. 아래 소스는 마요네즈와 오일, 토마토를 활용한 소스인데, 훈제 향이 은은히 돕니다. 


대부분의 유럽 식당에서는 우리나라처럼 생선을 바싹 구워 내지 않고 약간 덜 익었나? 싶을 만큼 촉촉하게 익혀 내어 오는데요, 이 부드러운 질감과 생선의 맛이 소스와 잘 어우러져 아주 맛있었습니다. 이 요리에서는 생선의 촉촉한 식감과 기름기, 마요네즈의 고소한 맛, 토마토의 감칠맛과 래디쉬의 아삭한 식감 등이 잘 어우러져 느껴졌습니다.



다음 주스는 당근 주스.

사실 이 주스들은 영 맛이 없습니다. 툭 터놓고 이야기하자면, 이상한 맛입니다. 정말로요. 특정한 맛이 너무 강하다거나(떫은 맛이라거나, 찝찔하다거나..), 식감이 지나치게 끈적거리는 느낌이라거나 등등.. 그런데, 같이 준비된 요리와 먹으면 정말 놀랄 만큼 맛이 변합니다. 이상한 신 맛이라고 생각했던 주스가 해당 요리와 함께 먹으면 요리의 다른 맛과 어우러져, 요리에 살짝 모자랐던 신 맛을 확실하게 채워준다거나, 끈적거리는 느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요리의 재료들을 적절하게 잡아 주는 소스 같은 느낌을 준다거나... 페어링이 단순히 어울리는 맛을 넘어, 마치 식사에 하나의 소스를 더 추가한 것 같은 느낌마저 주었습니다.


이 당근 주스의 경우에도 일반적인 당근 맛보다는, 겨자를 섞어 톡 쏘는 매운 맛이 굉장히 강하게(또는 이상하게) 느껴졌는데요, 가져다 주면서 이 겨자 맛이 다음 요리와 정말 잘 어울릴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가서 더욱 기대가 되었습니다.



다음 요리는 딸기파우더를 뿌린 치킨 요리입니다. 딸기파우더와 함께 벨 페퍼, 파프리카류의 덜 매운 향신료를 같이 뿌렸습니다. 위에 이불처럼 얇게 한장 덮은 것이 파스타 역할을 합니다. 딸기파우더와 벨 페퍼는 달콤하면서도 매콤한 맛을 냅니다. 파스타 밑에 촉촉하게 익힌 닭고기가 숨어 있습니다. 닭고기는 핑크빛이 돌 정도로 익혀 나왔는데, 촉촉한 육즙이 잘 느껴집니다. 특히 같이 페어링한 당근 주스의 톡 쏘는 매콤한 맛은 이 요리 자체에는 없는 맛인데, 하나의 맛을 더해 주는 소스와 같은 역할을 하여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아마 이렇게 음식의 맛을 더 깊이 있게, 또는 더 다양하게 만들어 낼 수 있어서 와인 페어링을 깊이 연구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다음 순서는 소고기 요리. 기대를 가지고 기다려 봅니다. 끈적한 비트루트 주스가 먼저 준비되었구요. 빨갛고 끈적거리는, 풋내마저 느껴지는 이상한 맛입니다. 단독으로는 먹기 힘든 맛이었는데, 요리와 함께 하니 마치 소스와 같이 잘 어울렸습니다. (아쉽게도 이 주스는 사진이 없습니다.)


이렇게 메인으로 생고기가 나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는데요, 혹시 별도로 숙성시킨 고기인지 물어봤더니 그렇지 않은 그냥 프레시한 고기라고 합니다. 다만, 당연히 이렇게 고기 덩어리를 하나 가져다 준 것은 아니고, 안에 여러 재료를 넣고 고기로 싼 형태입니다. 


단면을 잘라 보면, 오랫동안 볶아 단 맛을 최대로 끌어 올린 양파와 머스터드가 들어 있습니다. 고기는 아주 부드러우면서도, 얇게 자른 생고기라 약간 흐물흐물한 느낌도 없지 않은데 이 식감이 뭉근하게 볶은 양파와 잘 어우러져 원래부터 하나의 음식인 것 같은 맛을 냅니다. 그러면서도 느끼하지 않도록 머스터드가 균형을 잡아주고, 풋내마저 느껴질 만큼 쌉싸름하고 끈적이는 주스가 이 요리의 식감과 어울리면서도 느끼하지 않도록 맛을 잡아줍니다.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먹어본 여러 소고기 요리들 중 손꼽히는 멋진 요리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모든 식사가 끝나고, 디저트만 남았습니다. 페어링도 마지막 잔이죠.

마지막 페어링은 포도 주스입니다. 이 주스는 이것만 먹어도 맛있는 유일한 주스였는데요, 로컬로 조금만 생산되는 포도를 가지고 소다 형태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보통 디저트 와인의 경우 달달한 맛이 많다고 들었는데, 그런 역할을 하지 않나 싶습니다.


다양한 베리류를 활용한 아이스크림이 디저트로 함께 나왔습니다. 공예품에 가까운 멋진 모습의 디저트는 아니지만, 식사의 맛을 정리하고 산뜻한 맛을 입 안에 남기기에 충분한 맛입니다.


가장 마지막 메뉴. 간단한 한입거리 음식과 함께 과일을 준비해 주었습니다. 우리나 중국 식당에서는 이렇게 후식으로 과일을 주는 것을 종종 봤는데, 유럽에서는 처음 본 것 같았습니다. 포도같이 생긴 초록색 베리는 구스베리라고 하는데, 세계테마기행 체코편 출연자가 독특한 맛이라며 구스베리 잼을 사던 것이 기억납니다.





이 테이블에서 최종적으로 음식을 체크한 후, 가지고 갑니다.

안타깝게도, 체코나 프라하의 음식 문화에 대해 제가 아는 것이 많지 않아 하나하나의 요리가 어떤 전통 음식과 연관이 있는지, 혹은 어떤 요리를 재창작한 것인지를 알기는 어려웠습니다. 아마 그런 내용을 더 잘 알았다면 식사가 더욱 풍성해졌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La degustation boheme bourgeoise'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역시 주스 페어링. 이전에도 알콜 음료를 못 마신다고 하면 주스를 권하는 식당은 많이 있었습니다. 또한 기성품을 내더라도 고급 주스를 내거나, 일반적인 오렌지 주스, 포도 주스라 하더라도 직접 만든 주스를 내는 곳이 대부분이었는데요. 이 곳의 주스 페어링은 일반적인 주스가 아니라, 마치 하나의 소스를 더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주스 그 자체로는 정말 맛이 이상하다는 느낌이었는데, 요리를 한입 먹고 난 다음 다시 마셔보니 아까 돌출되었다고 느꼈던 맛은 더없이 부드러운 맛으로, 풋내라고 생각했던 것은 고기의 맛을 더해주는 향신료와 같이 느껴졌습니다.


아마도 와인 페어링을 즐기시는 분들은, 식사에 와인을 더함으로서 이렇게 음식의 맛이 더욱 풍부해지는 것을 즐기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 술을 못하는 제가 와인 페어링을 한다면, 아마 한 두 잔 마시고 음식맛을 아예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되겠죠. 그래서 아쉽게도 경험할 수 없는 영역이라 생각했는데, 조금이나마 그런 부분을 엿본 것 같아 더없이 즐거운 식사였습니다.



이 글을 쓰다 보니, 그림같이 아름다운 프라하의 전경이 다시 떠오릅니다. 다음 주제는 프라하의 명물 굴뚝빵과,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프라하 성 스타벅스를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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