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귀를 스스로 자른
괴롭고도 슬픈 고흐의 자화상은 유명하다.
그는 27살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37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34점의 자화상을 남겼다.
우연히 고흐의 작품 중 자화상만을 모아놓은 사진을 보았다. 10년 남짓 되는 짧은 활동기간 동안 홀로 자신을 들여다보았던 그의 시간이 보이는 것 같다. 괴롭고도 슬픈, 게다가 외롭기까지 한 고흐-
밑천 삼을만한 전문 분야가 없는 내가 브런치에 일기를 쓰면서 자아 전시회를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옷도 다 벗고 물어보지도 않은 질문에 혼자 대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부족한 글 한편을 쓸 때마다 오늘의 내가 되기 위해 살아온 시간들을 생각하다 보면 마음이 괴롭다가, 슬프다가..
단단하지만 명랑하게 살고 싶었는데, 무겁게 가라앉은 모습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느낌이랄까.. 내게 명랑성이 사라진 것인지, 글 쓰는 나의 페르소나가 이런 모습인 건지.
윌리엄 글라서의 현실치료이론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5가지의 기본 욕구가 있다.
1. 생존(Survival) : 생리적 필요와 안전의 욕구
2. 사랑과 소속(Belonging) : 타인과 연결되고 친밀한 과계를 맺고자 하는 욕구
3. 힘(Power) : 성취, 자부심,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
4. 자유(Freedom) : 선택과 독립을 추구하려는 욕구
5. 즐거움(Fun) : 삶에서 재미와 만족을 느끼려는 욕구
인간은 객관적 현실 그 자체를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행동과 선택이 결정되므로, 이 욕구들이 인간행동의 동기로 작용하고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한다.
위의 인간의 기본 욕구 중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순서대로 나열해 보니 매우 근소한 차이로
1번이 가장 앞에, 5번이 가장 뒤에 자리했다.
생각해 보면 남편의 네 번째 종양 재발에도 불구하고 어찌 되었든 그 결과가 양성이었으니 내가 처한 객관적 현실은 원영적 사고로 이것 참 러키 비키일 수도 있는데, 나에게는 남편과 어린 자식들의 안전과 생존을 위협하는 요인으로 인식되어 불안이 극대화되었다.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건강과 관련된 이슈에 마음이 쓰였고, 걱정과 위로로 그치는 것보다 실제적으로 도움이 될만한 나의 자원(시간, 정성, 체력, 돈)을 써야 그나마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 과정 속에서 즐거움의 욕구에 해당하는 것을 가장 먼저 포기했고, 이러한 선택이 나에게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남편의 우선순위는 보나 마나 5번이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을까' 염려되는 남편의 바쁜 일정과 건강상 이슈를 생각해서 어쩌다 남편에게 시간이 나면 '쉬어라', '자라'는 것이 나의 주문이었고, 남편입장에서 그 말은 무척이나 재미없는 말이었을 것이다.
내게 가장 중요한 기본적 욕구를 침해받았듯이, 남편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하니 우리 사이에 조율이 필요하다는 것이 크게 와닿았다.
오늘은 용인에 있는 호암미술관에 잠시 들렀다.
현재 호암미술관에서는 2025년 4월 2일부터 6월 9일까지 최대규모라고 꼽힐 만한 겸재 정선의 작품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눈이 부시게 날이 맑고,
꽃과 나무의 연둣빛으로 치장된 경관은 입이 벌어질 정도로 아름답다.
라디오에서는 가수 김건모 님의 '드라마'라는 노래가 나오는데 가수의 젊은 시절 목소리가 어찌나 낭랑한지 몇 번이고 다시 듣고 싶어진다.
'와,,,'하는 낮은 탄식이 미술관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오는 것으로 보아 두말할 것 없이 훌륭한 작품들이다.
평일 오전인데도 불구하고 사람이 꽤 많았는데, 작품에 몰입해 자신의 인이어로 작품 해설을 듣느라 한 손을 귀에 가져다 대고 눈앞의 유리벽까지 300여년 세월을 건너온 원화에만 집중하는 관람객들의 예절 또한 격조 있다.
아이들과 함께가 아닌 혼자 오롯이 즐긴다는 것도 특별하다.
오늘, 진짜 재미있네.
둘째를 임신하고 입덧으로 한참 힘들었던 어느 날,
감기에 걸린 큰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는 도중에 비가 내렸다.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소지품이 든 가방을 등에 메고, 한 손으로는 우산과 유모차 손잡이 하나를 함께 잡아야 하는데 어떻게 해도 요령이 부족했다. 비가 조금 오니까 우산을 포기하고 그냥 맞으면 될 일이었다.
둘째가 태어나면 오늘과 비슷한 상황에서 아기띠에 매달린 아기가 있을 테니 그때는 우산을 꼭 써야겠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운전면허 학원조차도 꺼려하는 상황에서 임신 5개월 차 임산부가 각서까지 써가며 학원에 등록했다. 9살 때 꽤 큰 교통사고의 경험으로 평생 운전을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보슬비 한방에 결심을 한 것은 내가 엄마이기 때문이었을까? 시간이 많이 지나 트라우마가 흐릿해졌기 때문일까?
각서를 쓰던 날로부터 13년이 지나
시간적 여유, 날씨, 공간, 음악, 콘텐츠, 무드, 취향껏 차려입은 옷과 화장까지 오직 나만의 즐거움을 위한 모든 것이 갖추어진 첫 번째 드라이브였다.
즐거움을 누군가와 함께 나누는 것은 이제부터 사랑에 맡길 일이라! 아직 제대로 쓰지 않아 뽀송뽀송할 나의 명랑이 뿅 하고 나타나면 귀여워서 어쩌나@.@
13년 전 운전면허 학원에서 나오며 뱃속에 우리 둘째에게 이야기했었지.
엄마가 너를 비 맞게 하지 않을 거야.
우리 곧 만나자-
그리고 지금은 나에게 말해.
네가 그냥 사라지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우리 곧 만나자 명랑아!
삼재를 살아가는 오늘의 생각_18)
내일은 장 보면서 여름맞이 내 티셔츠도 하나 사야겠다.
난 아이보리색이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