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이상 #7
나에게 그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 고통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 이상, '회한의 장' -
이해한다는 말을 나는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 흉내야 내본 적은 있다. 어떤 것의 뜻을 노트에 적어보고 고개를 연신 끄덕여보고 종종은 입에 기름을 바른 채 남을 가르쳐본 적이 있다. 내 설명을 이해한 사람은 없었다. 무언가를 이해한다는 말은 처음엔 공부와 함께했다. 어릴 때였다. 이해한다는 말, 그 단어를 처음 익히게 된 건 난쟁이 콩자루만 했던 시절의 구몬 선생님으로부터였다. 선생님은 문제 하나하나마다 '이해했니?'라는 질문을 덧붙여주시는 좋은 선생님이었다. 그때 나는 '네 이해했어요.'라는 내 대답의 의미에 아무런 의구심도 가지지 않고 끄덕임마저 더했다. 무엇을 이해한다는 것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건 대학에 와서야 알았다. '이것을 이해했니?'라는 물음 대신 '이해했다는 것이 무엇이니?'라고 묻는 교수님이 있었다. 운 좋게도 그런 좋은 교수님을 꾀 여러 명 만났다. 이해했다는 단어 자체의 이상스러움을 직접 느낀 건 시험을 통해서였다. 이론과 공식을 이해했다고 친구들과 내 영혼에게 자랑했는데 시험 문제는 틀렸다. 문제를 틀린 건 확실한 사실이니 이해했다는 쪽이 거짓이었다. 내가 말한 이해했다는 건 무엇이었을까. 요즈음엔 그 말이 조금 다른 식으로 다가온다. '남자를 이해하는 법', '여자를 이해하는 법',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법' 등. 사람들은 타인을 이해하는 것에 정말 관심이 많다. 나도 언젠가부터 그것에 퍽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것으로 나에게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 건 고통이 되었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말이 가지는 난센스는 타인을 이해한다는 말이 가지는 참 뜻을 아무도 모른다는 거다. 적어도 그 말은 여러 사람에게 각각의, 서로 아주 다른 뜻으로 여겨지곤 한다. '난 너를 이해해'라는 말은 내뱉기엔 쉬워도 듣고 믿기에는 어렵다. 나는 '너를 이해한다'는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실상 내가 하는 거라곤 듣고 끄덕이고 몇 번의 맞장구를 쳐주는 것밖에 없다. 한 번도 예외 없이 그랬다. 한 사례로, 도무지 취직이 안돼서 살기 싫어진다고 말하는 친구가 있었다. 나는 단번에 '너를 이해해'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말을 하면서도 나는 내가 어떻게 해야 그 친구를 '이해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친구가 느끼는 삶의 고통을 수치화해서 꼭 그만큼의 고통을 체험해봐야 하는 걸까. 아 죽겠다 싶을 고통을 겪어보면 될까. 쌀 두 포대 정도 등에 업으면 꼭 죽고 싶을 것 같은데. 아니면 친구의 상황을 완전히 내 것처럼 여긴 채 내가 친구라면 했었을 행동을 말해주면 되는 걸까. 내가 친구였으면 나 또한 죽고 싶다고 말할 것 같은데 그 말은 할 수 없었다. 정작 친구의 말을 듣고 내가 한 일이라곤 고개를 끄덕이면서 내가 취업 준비를 할 때 겪었던 버라이어티 한 사건을 떠올리는 것뿐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친구에게 '너를 이해해'라는 말을 해놓고는 사기꾼처럼 나 스스로에 대한 탐구를 했던 것이다. 실제로 친구는 '너는 나를 이해 못할 거야'라고 했다. 친구의 반박이 영 틀린 점이 없어 난 애꿎은 감자튀김만 포크로 짖잇겼다.
교과서의 개념을 이해하는 건 그래도 알듯 말듯하였는데, 타인을 이해하는 건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도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이 점이 고통이 되는 경우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 타인을 정말로 이해하고 싶은데 그게 안될 때다. 하나의 눈, 하나의 심장을 공유하는 것 마냥 상대와 하나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이해한다는 말 자체가 무색하게 그 사람에 대한 모든 걸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을 때가 있는데 그건 전생, 부활, 냉동인간 해동이 가능한 미래에도 불가능한 일이기에 그런 희망은 고통이다. 둘째로는 타인을 이해하는 게 무엇인지도 모르겠는데 부득불 타인을 이해해야 할 때이다. 그건 중동 현지 음식을 먹는 것보다 몇 차원 더 높은 미지와의 조우인데, 그게 또 내 의지가 아닌 강요나 압박에 의한 것일 때면 참 고통이 아닐 수 없다. 첫째의 경우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생기고 둘째의 경우는 직장에서 생긴다.
어느 직장이든 이해할 수 없는 동료가 있다. 동료를 이해할 수 없는 상황도 있다. 직장 생활을 하며 느낀 바, 타인을 이해한다는 걸 설명하는 건 상당히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지만 반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설명은 놀랍게도 간결하다. 꼴 보기 싫다는 게 곧 이해할 수 없는 거다. 동료가 꼴 보기 싫을 때를 추려보자면 입이 떡 벌어지고도 또 벌려보고 싶을 만큼 많다. 비관적으로 말하자면 꼴 보기 싫지 않은 경우를 골라내는 게 더 빠르다. 숨 쉬는 순간보다 숨 안 쉬는 순간을 찾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꼴 보기 싫지 않은 순간이 곧 상대를 이해하는 순간이 되진 않는다. 직장인은 그렇게 관대해질 수 없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건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따뜻한 종류의 것이겠다. 상대가 꼴 보기 싫지 않아 진다고 해서 마음이 따뜻해지지는 않는다. 이해해야지, 이해해야지, 이해해야지 하며 마음을 다잡아도 온기가 생기진 않는다. 그때의 마음은 차갑지도 미지근하지도 않고 그냥 감각이 마비된 듯 답답하기만 하다. 직장에선 이 답답함을 피할 수 없다. 즉 꼴 보기 싫은 동료를 억지로라도 이해해야 하는 순간을 피할 수 없다. 그렇지 않고선 일이 안된다. 반말조로 일을 지시하는 한 두 살 터울의 선배만큼 꼴 보기 싫은 동료가 없는데 그 아니꼬운 반말조를 수긍하고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일이 안된다. 직장이 가혹한 이유 중의 하나는 이처럼 상황 불문하고 상대를 어떻게든 이해하기를 강요받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를 말해보겠다. 입사 초기, 선배 중에 때만 되면 이상한 말을 꺼내는 사람이 있었다. 뻐꾸기 시계처럼 말이다. 'OO 씨를 잘 못 챙겨줘서 미안하다'는게 골자였는데 그 말이 이상한 이유는 선배가 티 나게 나를 안 챙겨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안' 챙겨주면서 '못' 챙겨준다고 말하는 게 이상했다. 더군다나 여자인 다른 동기는 티 나게 잘 챙겨주었다. 나는 선배가 참 꼴 보기 싫었다. 친구한테 이 정황을 말하니 친구는 다 그런 거라며 그냥 이해하고 넘어가라고 했다. 친구의 말을 듣고는 너 참 부장님이랑 똑같다고 일갈했는데 실제로 그건 부장 차장 과장 급 선배들이 주로 쓰는 말이었다. '다 그런 거야. OO 씨가 이해해야 해.'라는 말. 70년대 생 작가가 쓴 직장 상황극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인 줄 알았는데 70년생 직장인이라면 무조건 쓰는 현실 표현이었다. 고맙게도 내게 그런 말을 하는 선배들의 의도는 위압보다는 위로에 가까웠지만 그렇다고 그 말이 내게 아무런 고통 없이 전해지진 않았다. 도대체 선배를 이해한다는 것이 어떤 건지 알 수 없었다. 선배의 말이 속 빈 거짓말인 건 진작 알았다. 하지만 거짓말인 걸 아는 것이 곧 선배를 이해하는 것인지는 의문이었다. 나도 똑같이 다른 동료 특히 후배에게 비슷한 거짓말을 해봐야 하는 걸까.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내 마음이 따뜻해지진 않을 것 같았다. 조언 상대였던 한 과장님은 'OO 씨가 이해해~'하면서 친절하게 한 가지 방법도 알려줬다. 선배의 말을 외국어처럼 듣고 흘리라는 방법이었다. 실제로 그렇게 해보니 마음이 퍽 편안했는데 따지자면 그 방법은 내가 평소에 어림잡던 '무엇을 이해하는 일'과는 너무도 상반되어 혼란스러웠다.
가장 쉽고 정확한 결론을 내보도록 하겠다. 이 문제엔 답이 없다! '당신을 이해합니다'라는 말을 모르는 직장인은 없다. 실제로 그 말을 적절하게 구사하지 않은 직장인은 거의 없다. 그런데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는 직장인은 단 한 명도 없다. 그 말을 하는 직장인 모두는 마냥 답답해 보인다. 낙타가 바늘구멍 들어간다는 관용어가 있다. 타인을 이해하는 일은 바늘구멍도 아닌 하늘에서 구멍을 찾아들어가는 일이다. 하늘에 구멍이란 게 있나? 고백하자면 나는 여전히 '그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 고통'에 휩싸여 있다. 침대에서 이불을 덮듯이 직장에선 그 고통에 머리를 쥐어싼다. 이해하지 못할 동료, 동료를 이해하지 못할 상황이 지천에 즐비하다. 언제까지 마음 따뜻한 척 웃고 넘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서두에 밝힌 이상의 문장은 내 시점에서 그야말로 하늘에 구멍을 뚫어 들어가는 일에 다름이 아니다. 어떤 경위로 이상은 '무엇인가를 이해해야 하는 고통'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을까. 나는 이 답을 찾을 수 없다.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 글을 읽어온 독자분들에게 죄송하다. 혹 나완 달리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독자분이 있을까 싶어 이상의 시 전문을 아래 옮겨본다.
가장 무력한 사내가 되기 위해 나는 얼금뱅이었다
세상에 한 여성조차 나를 돌아보지는 않는다
나의 나태는 안심이다
양팔을 자르고 나의 직무를 회피한다
이제는 나에게 일을 하라는 자는 없다
내가 무서워하는 지배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역사는 무거운 짐이다
세상에 대한 사표쓰기란 더욱 무거운 짐이다
나는 나의 문자들을 가둬 버렸다
도서관에서 온 소환장을 이제 난 읽지 못한다
나는 이제 세상에 맞지 않는 옷이다
봉분보다도 나의 의무는 적다
나에겐 그 무엇을 이해해야 하는 고통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나는 아무 때문도 보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무 것에게도 또한 보이지 않을 게다
처음으로 나는 완전히 비겁해지기에 성공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