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이상 # 8
ㅉㅈㅈ내가 24세 나도어머니가나를낳으시드키무엇인가를낳아야겠다고생각하는것이었다.
- 이상, 육친의 장 -
작년 팀의 두 선배가 부모가 되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었고 각자의 가정이 있는 선배들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팀은 두 번의 출산을 맞았다. 재작년에도 한 번의 출산이 있었다. 그리고 올해는 출산 대신 출산 계획을 짜고 계시는 선배가 한 명 있다. 우리 팀은 회사에 기여는 못했어도 나라엔 기여를 했다. 열 명이 좀 넘는 팀에서 일 년에 한 번 이상의 출산 혹 출산 비슷한 것이 일어나고 있다. 나에게 출산은 퍽 아득한 일이다. 또래의 동료들 중에는 나보다 더 아득한 사람이 있고 반대로 꾀 현실적으로 아이를 갖는 일을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 동료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아이를 갖는 일은 당연히 피하고 싶은 일이면서 아마도 피할 수 없는 일로 여겨진다. 출산 혹 육아는 친구들보다 직장 동료들과 이야기했을 때 더욱 재밌는 몇 안 되는 주제다. 최근 난 점점 출산과 육아 이야기에 대해 몰입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있다. 이상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꿈을 이루기 전에는 절대 아이를 갖지 않겠다고 다짐해왔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꿈을 이루지 못했고 심지어는 대학생 때보다 꿈에서 더 멀어진 채 살아가고 있다. 내 꿈에 대한 묘사는 접어두기로 한다. 사실 굉장히 다양한 모습의 꿈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을 모두 성공이란 단어로 일축할 수 있겠다. 그저 잘 사는 것이 아닌 멋지게 산다는 걸 입증하는 것이 내가 그리는 성공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는 일은 분명히 아름다운 일이지만 내 기준에서 멋지진 않았다. 잘 산다고 덕담을 들을 수 있을망정 그 어떤 경외감과 갈채를 받을 수 있을 일은 아니었다. 가정을 꾸리는 건 멋지게 성공을 한 다음에 이어질 단계였다. 이어지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만큼 성공하는 것이 중요했고 우선이었다. 가정이 있고 아이가 있는 상태로 개인적인 꿈에 매진할 수 없다는 걸 잘 알았다. 그건 시간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도의적으로나 불가능하고 또 바람직하지 않았다. 우리 부모님보다는 결혼을 미루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모습이 더 롤모델이었다. 그랬는데 웬걸 어느 순간부터 손가락 두 개만 한 애기 신발이 너무 예뻐 보인다.
직장에선 결혼, 출산, 육아에 대해 침을 튀기며 이야기를 하다가도 퇴근 후에는 꿈을 향한, 성공을 위한 노력에 매진하곤 한다. 성공한 미래의 모습은 여전히 심장을 뜨겁게 만든다. 그러니까 이상스러운 것은 성공을 향한 바람은 여전한데 어째서 그런 성공에 큰 걸림돌이 될 결혼, 출산, 육아에 왕왕 관심이 가는가란 점이다. 누군가의 배우자, 누군가의 부모가 되는 걸 정말로 남일처럼 여겨왔는데 이제는 그런 선긋기가 전처럼 자연스럽지 못하다. 나에게 충고하는 육아 선배들의 말을 쉬이 넘길 수 없다. 충고를 하는 선배들의 공통점은 아주 평범한 직장인이란 점이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하는 '성공'과 동떨어진 채 인생의 정년을 맞이할 분들이란 말이다. 전 제 성공이 먼저인데요? 평범한 직장인 부모는 되지 않을 건데요?라는 내적 반발심이 재작년만 해도 두꺼운 철판이었다가 지금은 얇은 송판으로 바뀌었다. 여자 친구가 진지하게 결혼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면 송판이 또각 쪼개져 언제나 내 반쪽이었던 성공한 미래의 삶을 저 멀리 던져버릴 것만 같다.
한 가지 사례가 있다. 한 직장인의 이야기다. 그분은 내가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 중 가장 열심히 산 사람이다. 대학 시절엔 교환 학생, 복수 전공, 학생회, 인턴 등 대학생으로서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번듯한 직장을 구해서도 사업 준비니 재테크니 이런저런 준비들을 수도 없이 했다. 그랬던 그분은 공인중개사 시험 준비를 끝으로 불현듯 뜨거웠던 성공 투쟁을 멈추고 결혼을 했다. 그리고 초고속으로 부모가 되었다. 그때 그분의 나이가 꼭 지금의 내 나이였다. 지금 그분의 미래는 한 아이의 부모로서의 삶이 되었다. 부모로서 살아가는 일의 찬란함과 뿌듯함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분의 삶을 비꼬려는 것도 절대 아니다. 사설이지만 너무 힘겨울 만큼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오히려 그분이 좀 더 편하게 살길 바랐었다. 하지만 그분으로 하여금 누구보다 멋있어지는, 그 어떤 성공한 삶의 중독적인 달콤함을 포기하게 만든 동인이 무엇인지는 참 궁금했다. 바로 그것이 지금 내 이상스러운 변화의 범인이겠다.
범인은 나이다. 고백하자면 내 나이는 스물여덟이다. 청춘이 꺾이는 소리가 들리는 숫자다. 여러 번 곱씹어본 결과 변화의 범인은 나이다. 퉁쳐서 서른을 말해보자. 서른이란 나이는 묘하다. 성공한 서른 살의 OOO, 서른 살의 부모가 된 OOO. 둘 모두 빠른 느낌이 들지만은 딱히 어색하진 않다. 그런데 '성공하지도, 부모가 되지도 않은 서른 살의 OOO'이라고 하면 어색한 건 아니지만은 괜히 마음이 뛴다. 내가 보기에 서른은 통념적으로 '어른'의 기준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이 사회에서 무언가를 이루었거나, 이루었다가 말했거나, 거의 이루기 직전이 거나한 것이다. 아무것도 없이 준비만 하고 있기에는 늦다. 잠재력 혹 가능성이란 단어는 어른과 서른을 싫어한다. 이룬 것 없는 사람에겐 어른이란 칭호는 과분하다. 비슷한 환경에서 비슷한 조건의 사람들이 비슷하게 계단을 올라가는 직장에서 그런 느낌은 더욱 격하다. 한편 직장엔 희한한 관점이 있다. 늦은 나이까지 진급을 못한 사람보다 늦은 나이에도 아이가 없는 사람이 훨씬 뒤떨어져 보인다.
돌이켜보자면 난 성공하는 일과 부모가 되는 일을 한 저울에 올려놓고 있었다. 어른이 되길 준비하는 모든 사람들처럼 말이다. 저울은 항상 성공하는 일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쇠구슬과 사과를 얹어놓은 듯 확연했다. 그랬던 저울이 이십 대 후반이라는 나이, 말하자면 서른을 기점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의 해석은 이러하다. 저울이 필요한 이유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학생 때는 성공하여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것이 멋있어 보였다. 직장인이 된 요즘엔 부모가 되는 일이 퍽 쉽고 단순해 보인다. 성공하는 일은 점점 복잡하고 어려워진다. 나와 비교해 특별할 것 없는 동료들이 구렁이 담 넘어가듯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된다. 그들이 이룬 일을 내가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반면 대단하고 똑똑했던 사람들도 성공과 한참 떨어진 채 살아간다. 그들보다 내가 성공에 더 가까워지리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멋져 보이는 일보다 쉬워 보이는 일에 더 마음이 쏠린다. 뭐라도 이루고 싶다. 이게 내 변화의 전말이지 싶다.
서른이란 나이는 선택을 요구한다.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채 서른을 맞이하고 싶지 않다. 사회는 부모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제 몫을 했다고 인정해준다. 결혼도 하지 않고 그저 제 밥벌이만 하며 살아가는 건 어른으로서 다소 부족하다. 그 부족함 앞에서 사람들은 보다 단순한 선택을 하는 게 아닐까. 성공한 사람으로서의 어른보다 부모로서의 어른을 택하는 것이 아닐까. 점점 사회의 그 인정이 고파온다. 그와 같이 마음속에 이상스러운 열망이 차오른다. 무엇이라도 낳아야 하겠다. 성공을 낳는 일은 아직도 멀고 요원하다. 아이를 낳는 일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다. 내 아이가 될 아이에게는 참 죄스럽지만 이제 이런 생각이 막 드는 것이다.
'내 나이 28세, 나도 어머니가 나를 낳으셨듯이 무엇인가를 낳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