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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오기 Mar 16. 2023

남편 혼자 이사를 한다.

바쁜 척하는 마누라를 둔 죄?


 살다 살다 이런 일은 처음이다.

내가 담당는 업무에 중요한 회의가 잡혀

이사 전 날 지방 출장을 가게 됐다.


다른 부서장이 대신 가도 되지만 업무 관련 내가 가야 할 일이라 

대신 가 달라고 하기도 미안하고 애매하다.

게다가 우리 회사가 '을'이고 기관이 '갑'이라 사정을 이야기수도 없고

워낙 중대하고 큰 일이라 일정 변경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이사도 우리 집만 하는 일이 아니다 보니 바꿀 수도 없고

여러 사정을 다 아는 남편도 누굴 원망할 수도 없으니

'다녀와야지 머 '하며 어쩔 수 없이 허락 아닌 허락을 한다.'


바쁜 마누라를 둔 죄

오지랖 넓은 마누라를 둔 죄다.


게다가 워낙 중요한 회의라 업무에 신경 쓰다 보니 이사 준비가 뒷전이다.

마음이 떴달까?


겨우 한 거리곤

지난주 오래된 책 버린 게 전부다.


이상하게 계약할 때부터 미리 계획된 부부동반 지방 여행이 있어

남편과 나는 여행을 가고 두 딸들이 난생처음 계약을 했다.

부동산 중개사 말로는 딸들을 잘 키웠다고 안 오셔도 전혀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상대방이 위임장을 복사본으로 제출하는 걸 태클 건 건 우리 집 큰 딸이라고 한다.

'위임장을 복사본으로 가져오면 되느냐' 공공기관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등등

두 공인중개사가 애를 먹었다는 후문이다.

나름 기관에서 일을 하다 보니 서류 처리깔끔한 모양이다.


이래저래 새 집에 가면 무척이나 바빠질 것 같다.

계약 날엔 여수로

이번엔 목포로

전국 투어를 하는 최길동이 되고 있다.


암튼 오늘은 시간이 촉박하니 이사 시 꼭 필요한

계약금, 잔금, 관리실 정산, 기기 이전. 이사업체 일정 체크, 인터넷 연결 등 열 댓가지 체크리스트를 적어 놨다.

집에 가서 하나 둘 설명하고 전달해야겠다.


부디

이삿날 잡음 없이 이사하고

순조롭게 이사가 마무리됐으면 좋겠다.

특히 화나면 혈압 오르는 그이가 제발 화날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계약기간 전에 나가라고 한 집주인한테 태클이나 걸지 않을지 걱정이다.


이사를 앞두고 안 주인이 출장을 가려니 영 마음이 개운치가 않다.

살다 살다 내가 이사 다 해 놓은 집으로 출장 갔다가 퇴근할 줄이야


남에게만 일어나는 줄 알았던 일들이 하나 둘 내 일로 추가되며 경험 부자가 되어가나 보다.

부디 출장도 이사도 순조롭기를 퇴근길 전철 안에서 소망해 본다.


진짜 새로 이사 간 집에서 다시 이사를 하게 될 땐

좋은 일이 그득하길 바란다.


"여보 미안해

이사 잘 부탁해

화내지 말고 살살 달래며 이사해"


내가 맛난 거 사 올게~~




 퇴근길 전철에서 스마트폰으로 주절거리고 집에 오자마자 정리를 시작했다.

내 이삿짐도 이삿짐이지만 더럽게 살림했다고 흉볼까 봐 부엌 싱크대 정리에 수납장 정리에

욕실 한 번 더 청소에 여기저기 버릴 거 버리니 어느새 두 시가 지났다.

아직도 해야 할 게 산더미로 보이는 데 내일은 오후에 목포행 ktx를 타야 한다.


금요일 오후 반차를 낸 작은 애에게 이것저것 부탁을 하고

겨우 책상에 앉았다.

차라리 안 보면 괜찮으려나? 이대로 두고 가려니 걱정이 태산이다.


정말 사는 터전. 살림을 옮긴 다는 건 장난이 아니다.

살면서 뭔 짐이 그리 많은지, 살 땐 필요해서 샀는데 지나고 보면 다 쓰레기 같고

왜 샀나 싶은 게 낭비와 거리가 먼 줄 알았는데 은근히 과소비에 엉터리 살림을 산다.


아껴야 잘 산다는 데 이것저것 사느라 바쁜 날들을 산 것 같아.

아주 잠시지만 반성을 한다.


앞으로 덜 소유하며 살고

좀 정리하며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굴뚝같이 드는 밤이다.


이래서 이사는 가끔 다녀줘야 할 것 같다,


짐도 정리하고 마음도 다짐하고... 뭔가 전환점이 되긴 되는 것 같다.

그러나 먼 곳으로 가는 이사가 아니고 옆 동으로 가는 이사라 새로움과 허전함은 덜 하다.

어차피 같은 정문, 같은 산책길을 거닐 거라서.


오늘 밤,  이 집에서 마지막 잠을 잔다.

이제 자면 네 시간도 못 잘 텐데 어서어서 잠자리에 들어야겠다.

수정은 내일 또...


그래도 아직 '다음'이라는 기회가 있음이 고마운 밤이다.

그동안 고마웠다.

27동 206호야.




 지난주 책장을 정리하다 오래된 네 잎 클로버와 바짝 마른 15년 정도 된 단풍을 만났다.

덕분에 잠시 추억에 잠기고 정리가 더뎌졌다.


이제 안 읽고 책장만 장식하던 책들은 과감히 정리하기로 했다

특히 인터넷 세상이 되면서 필요 없어진 사전

오래된 프린트물, 다시 안 볼 것 같은 논문도 모두 버리기로 했다.

분명 필요하면 다시 검색을 하지, 지난 복사물을 찾진 않을 것 같으니 과감히 정리했다.


이사는 많은 걸 정리하게 하고

잠시 주변을 돌아보게 한다.

짐을 이고 살지 말라고

지난날도 가끔 반추해 보라고



후세는 사전을 기억할까? 습자기같이 가벼운 질감을 한 장 한 장 넘기고 단어를 찾아가던 순간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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