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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들

- 기억하려는 남자, 잊으려는 여자 19화

by 금희

경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후끈한 여름 햇살이 교실 유리창을 데우고, 먼지 냄새와 땀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그녀의 시선은 먼 운동장 너머, 굳게 닫힌 철문 쪽으로 흘렀지만, 마음은 그 어디에도 머물지 못했다.

태석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깨가 살짝 떨리면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는 모습,
입술 끝에 걸린 미묘한 긴장감.
묵묵히 버티는 모습이 측은했지만, 어쩌면 무심한 듯 보이기도 하는 얼굴 뒤의 초월적 차가움이 그의 가슴을 이상하게 뒤흔들었다.
그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시선을 따라 창밖으로 눈을 옮겼다.

어쩌다 공기 중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스치듯 부딪히는 듯한 착각은 그의 심장을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
사춘기의 서툰 연정, 혹은 단순한 호기심이라 해도 좋았다.
하지만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붉은 숨이 가슴을 덜컥 울리며 내려앉았다.

현수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태석에게 다가왔다.
“야, 너… 경리 좋아하냐?”
태석은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아냐, 내가 뭘?”

교실 한쪽에서 몇몇 학생이 킥킥 웃음을 터뜨렸다.
장난기 섞인 웃음, 놀림 섞인 웃음이 귀를 스쳤지만, 경리는 한 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창밖으로 시선을 옮긴 채, 먼 곳의 바람과 먼지, 햇살 속으로 마음을 숨겼다.

태석은 알지 못했다.
술래잡기처럼, 꼬리 잡기처럼 현수의 눈길이 불꽃처럼 자신과 그녀를 따라다닌다는 사실을.
하지만 경리는 그들이 무엇을 느끼든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때로는 모든 이로부터 스스로 벽을 세운 사람처럼, 고요하게 자신을 지켰다.

태석의 경리를 향한 눈빛이 짙어질 때마다, 현수의 마음 깊은 곳 어딘가가 꼬이며 따끔거렸다.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지만, 그 이유를 곱씹어 본 적은 없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를 지키지도 못하는 태석이 비겁해 보였다.

그래서일까. 그는 마치 보란 듯이 경리를 괴롭혔다.
그러나 그녀의 무심한 듯했던 어깨가 살짝 떨릴 때마다,
고개를 떨군 긴 머리카락 너머로 스치는 검은 눈동자가 옅게 흔들릴 때마다,
현수의 눈은 자신도 모르는 흔들림에 찔끔거렸다.

차라리 그녀가 담임에게 말했더라면,
혹은 화를 내고 욕이라도 했더라면 그는 멈췄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경리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 한마디 없는 그녀.

처음엔 단순한 재미였고, 그다음엔 내기처럼 버티는 힘을 시험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는 자신이 단순히 괴롭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있었다.
마음이 자꾸만 그녀에게 기울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면서도.

그것이 양심 때문이었는지, 사춘기적 호감 때문이었는지, 그는 끝내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기억은 언제나 바람처럼 스쳐갔고, 교실과 운동장은 여전히 조용히 흘러가는 듯 보였다.
그때의 일들은, 지금 돌아보면, 현수 자신에게도 여전히 흔적처럼 남아 있었다.

그 기억은 현수의 마지막 순간,
마치 경리의 흔들리는 머리카락처럼 창밖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어느 날 자신이 가장 행복하다고 느낀 햇살 아래, 도로 위를 비추며 핏빛으로 쏟아졌다.
바람처럼 삶이 으스러질 수 있다는 걸 느끼기도 전에 흘러내린 눈물 속에,
모든 순간과 모든 사람의 흔적이 길게 드리운 그림자처럼 자신을 따라다녔다는 것을 그는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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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잊혀진 작은 이야기들을 글로 옮기고 있습니다. 소리 없던 시간들을 글로 마주하는 여정을 시작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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