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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숙진 Apr 19. 2021

내 아이의 한국어 발음을 듣고 박장대소하던 그대에게

"야, 저건 너무 비현실적인데요!"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보던 중 아들이 한 말이다. 


어느 특정 장면을 지칭하는 건 아니다. 매회 드라마를 볼 때마다 자주 인용되는 주인공의 성장 배경과 성인이 된 모습이 아들에게는 비현실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같은 장면, 같은 상황을 접하더라도 경험에 따라 사람은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영국에서 한국인 부모와 함께 살아온 자신과 주인공 모습이 계속 비교되는 건 아들 입장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보다.


* 미리 밝혀두지만, 우리 가족은 이 드라마 팬이다. 작가와 연출, 제작진, 연기자는 물론 넷플릭스까지 이런 훌륭한 작품을 탄생시키고, 해외에서도 볼 수 있게 해 준 것에 감사한다. 


주인공 유진 초이 (이병헌)는 한국어와 영어, 일본어까지 능통한 사람이다. 미국인이면서, 통역사 없이 조선의 궁궐을 들락거릴 뿐만 아니라 사대부 집안 규수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사랑, 연민의 감정까지 느낀다. 


그런데, 그렇게 한국어에 능통한 사람이 정작 글자는 쓸 줄 몰라서 어린 꼬마 선생에게 가, 나, 다부터 배운다. 한 나라의 왕과 독대할 정도로 현지 언어가 완벽한 사람이, 어떻게 그 글자는 쓰지도 읽지도 못한단 말인가? 


무엇보다, 어린 나이에 고국을 도망쳐 미국에서 혈혈단신 살아남은 사람이 성인이 되어서도 모국어를 기억하는 것 자체가 가능한 일인가?


유진 초이처럼 해외에서 성장한 내 아들의 상황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같은 드라마를 보는 아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셈이다. 


드라마가 현실을 100% 반영해 주기를 바라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드라마 속 비현실적 요소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이도 없을 것이다.


천애고아 유진 초이에 비해 내 아들은 시대적 배경이나 환경 면에서 훨씬 더 유리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21세기 영국에서 한국인 부모와 살면서 매일 자연스럽게 한국어에 노출되었다. 한국어로 책도 읽고 드라마와 영화도 볼 뿐만 아니라 컴퓨터 문서도 작성한다. 유진 초이가 도망쳤다가 되돌아온 조선의 배경이 담긴 역사책도 읽는다. 


그런 내 아들의 한국어 실력은 실제 어느 정도일까?


유진 초이가 한 자 한 자 어렵게 읽고 배우는 가, 나, 다는 이미 이전에 다 깨우치고 지금은 편지를 쓸 정도의 실력이다. 아마, 드라마 초기 장면의 유진 초이와 내 아들이 국어 시험지를 두고 대결을 벌이면 아들이 더 우수한 성적을 받겠지. 하지만, 그런 아들이라 해도 정작 드라마 속 유진 초이가 하는 대사는 완전히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다. 대본을 가져다줘도 발연기, 국어책 읽기 연기는 고사하고 자연스럽게 읽어내는 것조차 버거워할 것이다.  


남자 주인공의 완벽한 한국어 실력에 아들이 주눅 들지 않도록 '드라마가 거의 판타지네'라고 하며 아들의 주장을 두둔해 줬다. 


피붙이 하나 없이 외국에서 혼자 성장하고도 모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3개 국어까지 통달한 언어 천재요, 불법 이민 고아로 시작해 미군 장교의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을 조선이 놓치다니.




자녀의 언어 교육을 두고 고민하는 해외 거주자가 많다. 현지 언어는 학교와 책, TV를 통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익히지만, 모국어 공부는 한국에서의 외국어 공부처럼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해서다.


영국에 사는 한인 가정의 자녀만 보더라도, 대체로 한국어가 어눌하거나 아예 못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래서인지 한국어로 읽고 쓰고 타자도 가능한 내 아들의 솜씨에 감탄하는 사람이 제법 있다. 물론, 이는 해외에서 오래 생활한 사람만 이해 가능한 감탄이다. 해외 경험이 없는 사람은 내 아들의 어눌한 말투만 듣고 비웃는 경우도 있다. 비웃는다는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이런 반응을 직접 목격했던 나로서는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다.



"야, 너 말하는 거 너무 웃긴다야. 영국에 살면서 사투리를 다 쓰네."


A가 내 아들을 보며 한 말이다.


학교와 직장을 모두 경상권에서 다니고 대부분 같은 지역 출신들과 시간을 보낸 경상도 사나이 아빠와 대화를 자주 나누다 보니, 아들이 말투마저 아빠를 따라간 모양이다. 나도 같은 경상권 출신이지만, 고향을 먼저 말하지 않으면 주변에서 모를 정도로 사투리가 심하지 않은 편이다. 


아이가 구사하는 어눌한 한국어와 사투리, 어색한 존댓말까지 웃음 요소로 작용했을 테다. 한국어 교육을 위해, 나는 아이와의 모든 대화를 존댓말로 나누고 부부 사이에도 존댓말을 쓰던 시절이다. 


문제는, 아들이 어린 친구에게까지 존댓말을 쓴다는 점이다.


"여기에다 이걸 깔고요, 이쪽으로 이렇게 통과시키면 된다요."

"아니다요, 그렇게 하면 안 된다요. 내가 보여줄 꺼다요, 따라 해 보시오!"


자기보다 더 어린 꼬마들에게 장난감 시범을 보이는 초딩 아들의 말투다. 이 말투만으로도 웃긴데 여기에 부산 사투리 억양까지 더해야 당시 상황이 재연된다.


이 날 꼬마들은 진지하게 아들의 설명을 듣는데, 옆에 있던 이 꼬마들의 엄마인 A가 갑자기 온몸으로 쓰러지며 박장대소를 했다. 웃기만 하는 게 아니라 '웃긴다'라고 큰 소리로 외치기까지 했다. 이 정도에서 그쳤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아들이 한마디 한마디 꺼낼 때마다, 이를 놓치지 않고 크게 웃고 떠들고 박수치기를 이어갔다. 30대 초반의 여성에게서, 특유의 웃음소리로 유명한 어느 여배우가 연기하던 우스꽝스러운 50대 아줌마가 연상되었다.


정작 A도 사투리를 썼다. 


자녀들은 아무런 편견 없이 내 아들과 잘 어울렸건만 A가 시도 때도 없이 웃고 떠드는 바람에 제법 진지하게 이어지던 아이들 놀이에 흐름이 끊겼다.


아들의 말이 웃기긴 하겠지만, 계속되는 A의 행동이 눈에 거슬렸다. 조용히 이 여자의 팔목을 잡아끌고 가서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싶은 심정이었다. 


"말이 어눌하고 사투리를 쓴다는 이유로 애 앞에서 그렇게 크게 웃어야 하나요?"

"어른이 웃는 이유를 몰라, 애가 당황하는 모습이 안 보이나요?"

"당신이 맡고 있는 학급에 우리 아들 같은 학생이 전학 와도 그렇게 웃을 건가요?"


곧 한국으로 복귀하는 가정이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A가 근무하는 학교에 해외파 학생이 다니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내 이름은 김순녀... 내 고향은 절라북또 상내면 넝고리... "


한 할머니가 통곡 조로 노래하듯 외치는 소리다.


10대 소녀 시절, 일본군에게 끌려가 온갖 고초를 다 겪은 위안부 출신 할머니의 사연이다. 할머니의 성함과 주소는 실제와 다르다. 


할머니는 일본군에게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되고도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태국에 정착해 오랜 세월 살면서 모국어인 한국어마저 잊은 상태다. 언젠가는 돌아가고픈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자신의 이름과 고향 주소만 외울 뿐이다. 


시대적 배경과 나이, 성별은 다르지만 이 할머니의 모습이 내가 생각하는 현실 속 유진 초이다.


커버 이미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장면, blog.naver.com/rainta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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