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국회의사당 내부 풍경을 소개하는 영상에 나오는 말이다.
수백 년간 이어진 전통을 고수하는 영국인답게 국회의원들 역시 의사 진행과 토론, 표결 과정에서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구식을 고집한다.
간단한 장비만으로도 지구 반대편에 사는 이와 얼굴을 보며 대화도 가능하고 각종 알림과 통신이 가능한 시대에 영국의 국회의원들은 '찬성', '반대'라 적힌 로비에 물리적으로 들어가는 방식으로 표결을 진행한다.
로비에 들어간다고 자동으로 인원수가 집계되는 것도 아니다. 각 공간에 들어간 사람의 머릿수를 일일이 세어 찬성표와 반대표를 파악하는 식이다.
표결 과정만 구식인 건 아니다. 오늘 이야기 주제인 종소리도 이런 구식 의회 진행 방식에 딸려온 문화다.
↑ 영국의 한 술집 내부 풍경이다.
사진 왼쪽에 있는 물체는 얼핏 보면 화재경보기인가 싶은데, 이 붉은색 물체 위에 적힌 문구가 눈에 띈다.
House of Commons Division Bell
하원의사당 표결 종
↑ 록 음악을 좋아하는 이라면 핑크 플로이드의 음반 '디비전 벨'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Division Bell을 인터넷에서 검색해도 음악에 대한 정보가 더 많이 나온다.
Division
* 표결
영국에서는 국회의원들끼리 모여 안건에 대한 토론을 벌인 뒤 찬반 표결을 위해 상, 하원실 입구로 이동해야 하는데 이 표결 시간을 알리는 종이 '디비전 벨'이다. 학창 시절 쉬는 시간에 친구들끼리 어울려 놀다가 종소리가 울리면 다 같이 교실로 들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핑크 플로이드의 음반은 예와 아니오의 선택이라는 의미를 담으면서 이 종의 이름을 땄다고 한다.
토론은 국회의사당 내부에서만 벌이는 것도 아니요, 국회의원이라고 해서 이 토론에 참여해야 하는 의무도 없다고 한다.
찬성이든 반대든 자신의 표결 방향을 이미 결정한 사람은 토론에 참여하는 대신 국회의사당 외부에서 자유롭게 시간을 보낸다. 혹은, 일부 동료 의원들과 조용히 대화를 나눌 공간을 찾기도 한다.
이도저도 아니면 배가 고파서 혹은 목이 말라서 식당이든 술집이든 찾는 경우도 있다. 하루 안에 통과시켜야 할 법안이 산더미처럼 쌓인 상태라면, 국회의원도 사람인데 몇 시간씩 국회의사당에 갇혀 지내는 것도 괴로움이니까.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휴식을 취하다가 언제든 국회의사당으로 달려갈 수 있도록 종이 울린다고 한다. 영국의 의회 습관이 국회의사당 주변 시설에까지 반영되고 전통으로 이어져 온 셈이다.
이런 종이 달려 있는 곳이 바로 앞서 나온 사진의 술집이다. 이외에도 식당과 호텔은 물론 일부 의원의 사저에도 종이 달려 있다. 런던 전역에 해당하는 건 아니고, 종소리를 듣고 국회의사당으로 직행할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곳만 해당한다.
↑ 디비전 벨 지도.
이름 그대로 디비전 벨이 설치된 업소를 표시해 놓은 지도다. 우측 상단에 두 개의 탑과 함께 불쑥 솟은 건물이 국회의사당이며 그 뒤로 템스 강이 보인다. 지도 곳곳에 붉은 이미지가 자그맣게 표시되어 있는데, 디비전 벨이 설치된 업소임을 가리킨다.
아니다.
관광객으로 붐비는 런던 시내 번화가에 위치한 국회의사당이요, 이 건물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식당과 술집, 호텔이니 누구나 출입 가능한 장소며 런던에서도 유서 깊은 건물이다.
즉, 일반인도 종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말이다.
아래 영상에서 1분 2초 지점에 종이 울리는데 직접 들어보자.
런던 시내를 구경하다가 식사를 하러 들른 식당에서 혹은 목을 축이려 자리를 잡았던 술집에서 갑자기 이런 소리가 나온다면 당황할 수밖에 없다. 생김새와 소리까지 화재경보기를 연상할 만하니.
개인적으로, 이 8분이라는 시간에도 의문이 들었다.
고등학교 때 10분의 쉬는 시간 동안 매점으로 달려가 컵라면으로 배를 채우고 초코파이로 입가심을 한 뒤 화장실을 들렀다 교실로 돌아와 낮잠까지 잤다고 한 친구가 있었다. 그 말을 듣고 반신반의하긴 했으나, 성인이 된 지금 입장에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10대의 체력과 무모함으로 밀어붙인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10분은 너무나 아쉬운 시간인데 영국의 국회의원은 10분이 아닌 8분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종이 언제 울릴지도 모르는 상태로 대기하고 있다가, 소리가 들리기만 하면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국회의사당으로 들어가 투표까지 마쳐야 한다.
디비전 벨 지도에 나오는 업소를 구글 지도로 검색해 봤다.
국회의사당 건물에서 수직으로 내려가면 지도 하단에 Albert라는 술집이 나온다. 지도상으로는 국회의사당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업소로 800미터, 도보로 12분 거리다. 교통 신호를 다 무시하고 전속력으로 달린다면 가능할지도.
글쎄다.
개인적으로 런던을 수차례 방문하면서 식당과 호텔, 술집을 이용한 경험이 있지만 지금껏 들은 적 없다. 이런 종소리가 울린다는 사실도 비교적 최근 알게 되었다. 5년간 런던에서 근무한 남편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디비전 벨이 울리긴 할까?
이 종소리는 국회의원의 표결 참여를 알리는 소리다. 국회가 회기를 맞이해야 하며 상정된 안건이나 법안을 통과시켜야 하는 때다.
영국의 국회 회기는 학생들의 학기와 거의 유사하다. 학교가 방학, 주말, 공휴일을 맞이할 무렵 국회도 휴회를 한다.
나의 런던행은 대부분 주말이나 아들의 방학을 기념하여 나선 길이었다. 간혹, 중요한 용무로 주중에 런던을 방문한 시기도 있지만, 국회가 회기를 맞이하고 또 표결을 실시하는 시기, 시간과는 맞물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다시 런던을 방문한다면 디비전 벨이 설치된 업소를 하나씩 찾아가고 싶다.
이왕이면, 종소리를 듣고 싶다.
국회의사당을 향해 급히 뛰어가는 국회의원도 구경하고 싶다.
그러려면, 영국의 국회의원 얼굴을 다 익혀두어야지.
새로운 안건이나 법안이 상정되는지 국회 일정도 파악해야 한다.
국회 정보를 수시로 검색하고 의원까지 쫓아다니다 테러범으로 의심받지는 않을까.
여전히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커버 이미지: Photo by Mike on Pexels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