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단횡단이 없는 영국
영국의 한 교수가 미국에서 겪은 일이다.
학회 참석차 애틀랜타에 머물고 있을 때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위치한 두 개의 호텔에서 학회가 동시에 열리고 있었다. H 호텔에서 한 세션을 마치고 다음 행사 장소인 맞은편 호텔로 가기 위해 도로를 건너려 했다. 한 젊은이가 불쑥 내 앞을 가로막더니 "이곳에서 길을 건너면 안 됩니다"라고 소리치는 것이 아닌가. 처음 보는 사람에게 대뜸 소리부터 치니 불쾌했지만, "조언해줘서 고마워요"라고 말을 건넨 후 목적지로 계속 향했다. 그랬더니 이 사람이 아까보다 더 거친 태도로 나오며 내게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한다. 낯선 사람이 무작정 신분증을 요구하니 황당할 수밖에 없다. "그럼 당신 것부터 보여주시오"라고 받아쳤다. 그랬더니 이 남자가 "당신을 체포하겠소"라고 외치며 내 다리를 발로 걷어 차고 땅바닥에 쓰러뜨려 꼼짝 못 하게 했다. 이 남자의 동료로 보이는 이들까지 갑자기 여럿 나타나 내 주위를 둘러싼다.
위 사진이 실린 기사를 읽고, 해당 교수의 입장에서 내가 옮겨 적은 글이다. 이 교수는 이날 경찰에 체포되어 8시간이나 철창신세를 져야 했다. 2007년에 있었던 일인데 무기도 없고 도주범도 아닌, 무단횡단이라는 이유만으로 50대 남성에게 다섯 명의 경찰이 달려든 것이다. 미국 경찰의 과잉 대응과 폭력은 그 때나 지금이나 논란이 되긴 마찬가지다. 영국 문화에 익숙한 이 교수는 미국의 교통법규는 물론 경찰 명령과 복종 문화를 알지 못한 것이다. 상대가 경찰인지도 몰랐다고 한다.
영국에는 ‘무단횡단’이라는 말이 없다. Jaywalking이라는 단어는 있어도 쓸 일이 없다. '무단횡단'을 규정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초보 해외 여행자를 대하는 여행사 직원이나 노부모에게 효도 관광을 시켜주는 자녀가 있다면
외국에는 무단횡단이 불법입니다. 영국에서처럼 아무 데나 길을 건너면 안 돼요. 벌금을 내거나 체포당할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라고 누누이 강조할 것이다.
영국의 거리를 걷다 보면 신호등이나 건널목을 눈앞에 두고도 차도를 당당하게 건너는 사람이 있다. 아직 초록 신호등이 안 들어왔는데도 자연스럽게 횡단보도를 지나기도 한다. 길을 가던 경찰까지 이들 행렬에 동참할 때도 있어서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어린 아들을 동반하고 다니면, 아직 길 건널 생각도 없는데 달려오던 차가 먼발치부터 속도를 늦추고는 우리 모자더러 길을 건너라고 손짓을 해줬다.
고속도로처럼 보행자의 출입 자체가 불가능한 곳을 제외하고 영국의 모든 도로는 건널 수 있다. 사람, 동물 할 것 없이 누구든 먼저 도로에 발을 들여놓으면 우선권이 주어지므로 운전자는 차를 정지할 의무가 있다. 보행자를 배려하는 광경을 자주 목격하다 보니 외국인들은 "영국 운전자가 친절하다"라고 평한다. 그런데 이는 기본 교통법규를 준수한 것에 불과하다.
위 사진은 영국의 보행자와 운전자가 지켜야 할 안전 수칙을 소개한 사이트에 실린 것이다. 왼쪽 사진은 보행자가 안전하게 길을 건너는 방법을 설명한다. 건널목이 많지 않은 영국의 주택가는 이렇게 건너는 광경이 흔하다. 오른쪽은 운전자가 보행자를 만났을 때 대처하는 방법을 설명한다. 위험해 보이지만, 이 상황에는 보행자에게 우선권이 주어진다.
- 영국에 처음 오는 분들에게 -
영국의 운전자가 친절하다고 (법규를 잘 지킨다고) 여유를 가지면 안 됩니다. 정지선도 제대로 안 지켜놓고 보행자에게 신경질적으로 나오는 운전자도 있습니다. 무단횡단이 가능하다고 마음 놓고 돌아다녀도 안 됩니다. 운전 방향이 한국과 반대이니 어린이는 물론 성인도 길을 건널 때 좌우 살피는 방식에 새로 적응해야 합니다.
운전하는 분들은, 어디서나 보행자가 튀어나올 수 있고 건널목이 아닌 곳에도 길을 건너는 이가 있으니 대비하세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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