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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 Oct 19. 2024

박카스 젤리와 출근길 지하철 시위

혐오가 세상을 뒤덮은 것 같던 어느 날,

휠체어 사용 아이들에게 휠체어 사용 교육을 했다.

 

아이들은 처음 회사에 오면 상담을 하고 간단하게 제품을 타보고, 사이즈를 재고, 휠체어 색깔을 고르고 간다. 그러고 나서 아이의 신체 사이즈에 맞춰 휠체어를 제작하는 데는 한 달에서 한 달 반. 사실 아이들이 직접 고를 수 있는 거라곤 ‘휠체어 색깔’ 정도가 전부인데 한참 고민을 하다 색깔을 고른 아이들은 그때부터 ‘내 휠체어’를 기다린다.


그렇게 ‘내 휠체어’를 받으러 오는 날 아이에게 휠체어 사용 교육을 한다. 한창 업무를 하다가 휠체어 교육을 해야 하는 아이가 도착하면 업무를 멈추고 내려가 아이에게 기본적인 휠체어 사용 교육과 제품 사용 교육 그리고 부모님께 주의사항을 알려주는 업무인데, 휠체어 교육이 참 성가시고 귀찮은 업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 아이가 휠체어를 받으러 갈 생각에 들떠 전날 잠도 설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생각이 바뀌었다. 나에게는 전혀 특별하지 않은 오히려 가끔씩은 귀찮고 성가신 순간이 누군가에게는 설레서 잠도 못 잤을 정도로 기대하며 기다린 순간이라는 말에.


그날도 정말 오랜만에 휠체어 교육이 있었다. 4시까지 오기로 한 아이의 부모님은 5시는 되어야 도착할 것 같다는 연락을 해왔다. 기다리는 사람보다 기다리게 하는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분주한 줄 알기에 정시에 퇴근할 마음을 내려놓고 기다리니 마음이 참 편했다.


5시가 넘어 도착한 아이는 자기가 고른 하늘색깔 휠체어 프레임에 잘 어울리는 하늘색 청 재킷을 입고 왔는데, 교육을 하는 내내 아이의 청자켓 주머니에 박카스 젤리가 빼꼼히 나와 있었다. 교육을 마치고, 아이와 부모님께 주의사항을 다시 한번 설명하고 혹시 질문이 있냐는 말을 하며 마무리를 하려고 하는데, 아이가 웃으며 “선생님 주고 싶어서 가지고 왔어요.”라며 박카스 젤리를 준다. 30분 남짓 휠체어 사용 방법을 가르쳐 주면 나는 어느새 아이에게도 부모님에게도 ‘선생님’이 된다.


그리고 평소보다 늦은 퇴근을 하며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 문득 이번에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다는 그 아이는 언제쯤 내가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일상을 보낼 수 있을까 하는 답답한 마음으로 지하철 플랫폼에 도착을 했다.


지하철을 기다리며 주머니에 손을 넣으니 만져지는 박카스 젤리. 마스크를 조금 내리고 조용히 봉지를 뜯어 코를 대어 보니 박카스 냄새가 난다. 달달하고 상큼한 박카스 냄새를 맡으며 왠지 모르게 조금 힘이 났던 것 같다. 이상하게 그날은 늦은 퇴근길도, 지하철을 타는 것도, 정말 오랜만에 몸도 마음도 덜 힘들었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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