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미래에 도달하는 우리의 방법
언젠가 영국의 한 재단 소개를 살펴보고 있는데 이런 문장이 있었다.
“우리는 신체적, 정신적 또는 장기적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 그들 자신보다 ‘운이 더 좋은’ 다른 사람들과 가능한 한 동일한 선택, 삶의 질의 기회 그리고 열망을 가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We believe that people living with a physical and/or mental disability or a long-term illness should have, as many as possible, of the same choices, quality of life opportunities, and aspirations as others more fortunate than themselves.
장애가 없는 사람은 ‘운이 좀 더 좋았을 뿐’이라고 말하는 표현방식이 참 좋았다. 맞아, 생각해 보면 장애가 없이 태어난 데에는 나의 노력이 들어간 건 아니었으니까.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수많은 우연 속에서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뿐이었지. 우리 모두는 그 기적 속에서 태어났고, 그냥 조금 더 운이 있거나 없었을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운‘을 너무도 쉽게 나의 노력과 능력이라 착각한다. 내가 운이 좋았던 건 마치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나는 미국의 정치철학자 존 롤스의 무지의 장막(Veil of Ignorance) 사고 실험을 좋아하는데 이 사고 실험 속에서는 자신들의 운은 망각한 채 온갖 이유를 가져다 대며 “어쩔 수 없다, 지금은 이게 최선이다.”하는 사람들도 이 장막 뒤에서는 모두 같은 선택을 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럼 이렇게 말해줘야지. “거봐 내 말이 맞잖아!”
무지의 장막 사고 실험의 핵심 개념은 다음과 같다.
1. 모든 조건의 백지화: 개인은 자신의 성별, 인종, 사회적 지위, 경제적 상황, 능력 등에 대해 알지 못한다.
2. 공정한 판단: 이러한 무지 상태에서 사회 구성원들은 편견 없이 가장 공정한 원칙을 결정할 수 있다.
이런 조건 속에서 ’공정한 사회‘를 만드는 핵심은 바로 이를 통해 자연적이거나 사회적인 ’운‘이 ‘불평등’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운의 중립화‘를 이루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런 조건들 속에서 ‘공정한’ 사회를 새로 설계한다고 하면, 우리는 저상 버스가 일반 버스보다 두 배 가량 비싸다고 하더라고 기꺼이 저상 버스를 선택할 것이고, 지하철 엘리베이터 설치에는 수십억의 비용이 드는데, “이 정도가 어디냐, 있는 거 잘 타고 다니면 되는 거 아니냐”는 말을 감히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면 그 공정할 사회에서는 내가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일지 아닐지 알 수 없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무지의 장막 뒤에서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현실적 최선’은 더 이상 감히 작동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내’가 운이 조금 좋지 않아 장애인으로 태어난다고 하더라도 저상 버스가 없어 버스를 탈 수 없거나, 엘리베이터가 없어 지하철을 탈 수 없는 불평등으로 이어지면 안 되니까. ‘나’에게는 감히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니까.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 이 이상적인 사고 실험은 현실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조금 더 상상을 확장해보면 어떨까? 예를 들어 어떤 가능성에 대한 상상으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태양계 내에 새로운 거주지를 마련할 가능성이 높은 시대를 살고 있다. 화성 탐사선이 화성 궤도에 진입하고, 달에 우주 비행사를 보내고, 민간 유인우주선은 국제 우주정거장에 도착했다는 뉴스들이 더 이상 놀랍지 않은 시대를 살고 있다. 새로운 행성에서 우리가 살 거주지를 처음부터 설계하고 짓는다면 이 이상적인 사고 실험이 과연 현실이 될 수 있을까?
예전에 읽었던 <사이보그가 되다 (김원영﹒ 김초엽, 출판사 사계)> 책에서 ‘당신의 우주선을 설계해 보세요’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책에 따르면, ‘SF작가이자 편집자인 앤디 뷰캐넌은 <우주선을 설계해 보세요.>라는 글에서 독자에게 ‘거주가능한(habitable)’ 우주선이나 우주 정거장, 인공 행성을 상상해 보라고 제안한다. 어떤 우주 공간이 ‘거주 가능한’ 곳이 되려면 몇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하는데, 말 그대로 인간이 거주 가능한 환경을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 이런 우주선을 설계하라고 했을 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은 어떤 모습일까. 아마도 우리는 자신을 기준으로 놓고 ‘내가 거주 가능한’ 우주선만을 떠올릴 것이다. … 건강하고 장애 없는 몸을 가진 개인조차 그를 환대하지 않는 물리적, 사회적 환경에서는 얼마든지 장애를 경험할 수 있다. 이 사고 실험은 접근 가능한 세계를 단지 ‘상상하는’ 일조차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럴 때 ‘정상’에서 벗어난 몸을 가장 잘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은 누구에게 있을까? 비장애인과 장애인 중 ‘모두가 거주 가능한’ 공간을 설계할 수 있는 존재는 누구일까?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무지의 장막 뒤에서 조건을 지우는 가상의 실험을 하지 않아도, 이미 거주하기 적합하지 않은, 보편적 공간에서 소외되며 기꺼이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존재들. 그리고 이들이 축적한 복잡하고 고유한 경험들. 그리고 이 경험 위에 상상해 볼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 우리를 ‘더 나은’ 미래로 도달하게 할 유일한 것은 ‘운’이 아니라 바로 이런 ‘가능성’이 아닐까.
하지만 아직은 화성을 상상하고 싶지 않다. 화성을 꿈꾸는 민간 우주산업 회사보다는 우리가 숨 쉬고 있는 이 지구에 오늘도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고 있는 사람들을 더 믿고 싶으니까. 그래서 아직은 지구를 포기할 수 없다. 물론 매 순간 그 충동을 참기란 정말 쉽지 않지만, 그래도 만약 더 나은 미래를 꿈꾼다면 아직은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 꾸고 싶다.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I hope some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be as one.”
- Imagine, John Lenn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