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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경덕 Jun 08. 2020

길 잃기 알고리즘




명상 모임을 다녀왔다. 방석 위에 앉아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하고 내면을 응시해야만 하는 특별한 사연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마음의 병도 없고, 건강을 잃지도 않았고, 풀지 못한 숙제같은 트라우마도 없고, 나를 괴롭히는 상사도 없다. (느닷없이 찾아오겠지만). 부모님은 대체로 안녕하시다. (자세히 보면 모를 일이지만). 올 해 서른 넷이 되었고, 재난 지원금과 청년 수당과 올 9월에 환급받을 근로장려금, 그리고 독서모임 강사로 받는 강사료로 올 한 해의 생계를 계획하고 있다. 다만 저축해놓은 돈이 없고, 국민연금은 못 내고 있고, 건강보험료는 밀려 있고, 몇 주 전에 결혼한 친구 결혼식 때 현금이 없어 못 낸 축의금은 며칠 전에 카카오페이로 보내줬을 뿐이다. 요즘 어때? 라고 누가 물으면, 별 일 없다고 답한다. 장래가 촉망되지 않고 미래가 불확실할 뿐이다. 


도시에 살지만 주로 집에 있고, 때 되면 밥을 해먹고, 집안일을 하고, 옥상에 상추를 키우고, 방에서는 책을 읽는다. 별 일 없는 하루를 보내지만 길을 잃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길을 꼭 찾고 싶지는 않지만 길을 잃고도 사뿐 사뿐 걸어가고는 싶다. 근데 발걸음이 사뿐사뿐하지 않고 몸이 무겁다. 충동적으로 잠깐 내달리다가 이내 기력을 잃는다. 일상이 리드미컬하지 못하다. 어디가 고장난 건 아닌데 생의 페달이 뻑뻑한 기분이 든다. 이대로도 나쁘지 않지만, 이대로는 남은 인생이 너무 길고 아득하다. 어떻게 진단해야 할까?


질병이 없으니 병원은 소용 없고, 트라우마가 없으니 심리상담도 의미 없다. 유일신을 믿지 않으니 신의 구원은 요원하고, 미래가 궁금하지 않으니 사주/점도 관심 없다. 술, 담배, 게임도 안 하니 중독이 주는 짜릿한(?) 도피처도 없다. 밥은 잘 챙겨 먹으니 칼로리 부족 때문도 아니다. 사회 이슈에 관심을 갖지만 압도적인 불의 앞에서 무기력해진다. 가만 보니 문제가 밖에 있는 것 같지 않다. 길을 잃은 듯한 기분, 페달이 뻑뻑한 느낌은 세상물정을 몰라서가 아니라(모르기도 하지만) 내 마음, 내 의식의 알고리즘에 대한 무지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었다. 그러던 차에 명상 모임 모집글을 보게된 것이다.


명상 센터는 건물 1층에 있었다. 선생님 혼자 계셨고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들어갔다. 나까지 두 명 신청했는데 다른 한 분은 안 오셨다. 일대일 수업이 돼버렸다. 선생님은 중년의 여성분이셨다. 웃음이 많으셨는데 갑자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할 때면 무표정하게 눈을 내리깔기도 했다. 정적이 흐를 때는 조금 어색했지만 공간의 편안한 분위기 때문인지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화이트 톤의 벽과 파스텔 톤의 커튼, 푹신한 등받이 의자, 다양한 사이즈로 진열되어있는 싱잉볼들, 그리고 한 쪽 벽에 있는 책장에는 요즘 읽고 있는 틱낫한 스님의 책도 꽂혀있었다.


선생님은 전생을 믿는다고 했다. 명상을 깊이 하면 자신의 전생도 볼 수 있다고 했다. 전생을 믿지 않는 나는 평소 같으면 의견을 달리 하거나 좀 더 납득할 수 있는 언어로 재해석하려 했겠지만(이를테면 유전의 법칙이나 생명 진화의 은유적 표현이라는 식으로) 선생님의 아우라가 언어 밖의 맥락을 말해주는 것 같아 그대로 수용했다. 명상을 시작하기 전에 삶에 어떤 의미를 두고 있는지, 혹은 어떤 목표를 갖고 있는지 물으셨다. 목표나 꿈은 없고.. 풀타임 일을 피하면서 최소한의 시간제 일을 하고 있다, 남는 시간에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모임을 하거나 텃밭 농사를 깨작 깨작 짓는다, 호기심은 많은데 거의 모든 것을 겉핥기로 경험하고 있는 기분이다, 소속된 단체나 회사는 없고 프리랜서로 일을 하고 있다, 등등. 질문과 별 상관 없는 답변을 늘어놓았다. 선생님은 스승이 있냐고 물으셨다. 스승은 없고 동료들과 읽고 쓰는 커뮤니티를 만들어 교류하고 있다고 말했다.


선생님도 명상을 지도하게 된 계기, 어렸을 때부터 자기도 모르게 선정에 들거나 영적 체험을 한 이야기, 남들처럼 꾸역 꾸역 살다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식의 성장이라는 결론을 내려 십년 전부터 공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센터 윗층이 선생님 댁이라는 이야기, 수업 끝나고 코로나로 온라인 수업을 듣는 대학생 딸 점심을 차려줘야 한다는 이야기도 해주셨다. 명상가도 다 큰 딸 밥을 걱정하는구나 싶어 가부장제와 가족주의의 폐혜를 떠올렸지만 너무 비약하는 건가 싶어 흘려보냈다. 공간을 얻게 된 것도 신기한 인연 덕분이었다고 말씀하셨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미루셨다. 일대일이라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본격적으로 명상을 해보기로 했다. 


"편하게 앉으시고, 누가 머리를 살짝 들어올린다는 기분으로 상체를 펴주세요. 양 손은 무릎 위에 놓습니다. "


"숨을 마시고, 숨을 내쉬고. 몸의 반응을 살펴봅니다. 불편하면 불편한대로, 몸의 감각을 있는 그대로 느껴봅니다."


눈을 감고 숨을 마시고 내쉬고,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서 정수리부터 얼굴, 목, 내장, 복부, 배꼽 아래까지 의식을 몸 구석 구석에 집중하는 시간을 가졌다. 명상하는 동안에 수시로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의식은 호흡과 신체에 잠시 머물다가 금새 과거와 미래로, 온갖 관념적인 생각으로 이동했다. 어제 유튜브에서 본 댓글, 아침에 도서관에서 온 연체 알림 메세지, 좀 이따 먹을 점심 메뉴, 선생님은 눈을 떴을까 감았을까, 눈 감은 내 표정은 어떻게 보일까.


"딴 생각이 나도 알아차리고 다시 의식을 몸에 집중합니다."


중간 중간 선생님의 안내에 따라 얼굴 근육, 눈, 코, 입에 집중하다가도 의식은 자꾸 몸에서 벗어났다. 의식은 배꼽 주위에 머물다가 담주 세미나에 읽어가야 할 푸코의 책으로 이동했다. 아직 본문은 못 읽었고 어제 읽은 역자 서문의 어떤 구절이 떠올랐다.  


푸코는 지배적인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적 테크닉과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오이디푸스적인 탐색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려 한다. 실제로 실존의 테크닉은 다수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발명해 내야 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을 해석을 통해 재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만들어 내는 일이다.
(푸코의 주체의 해석학 역자 서문 중)


명상은 왼쪽 팔이 뻐근해질 때쯤 끝났다. 눈을 뜨고 몸을 풀어주며 공간을 둘러보았다. 30분 정도 지나있었다. 선생님은 소감을 물으셨다. 자꾸 딴 생각이 나고 몸도 편치는 않은데 개운한 느낌도 든다고 대답했다. 눈을 감고 가장 오랜 시간 앉아 있는 경험이기도 했다. 처음이라 몸이 조금 긴장돼 보였고 왼쪽 팔이 뻐근한 것도 신체가 경직되어 혈액순환이 잘 되지 않은 것 같다고 말씀해주셨다. 


고작 30분 동안 눈을 감고 내부를 들여다보려 애썼지만 의식은 그리 협조적이지 않았다. 명상을 통해 의식의 산만함을 보았다. 명상으로 무엇이 바뀔 수 있을까. 생의 페달이 뻑뻑하게 느껴지는 건 산만한 의식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어쩌면 명상할 때 뿐만 아니라 뭘 해도 잡생각에 의식을 빼앗겨 경험해도 경험하지 못했던 건 아닐까. 그래서 경험하는 대상(사람, 책, 사건 등)과 능동적으로 섞일 수 없었던 건 아닐까. 


근데 정말 산만한 의식이 문제일까. 산만한 지각은 우연성, 다양성, 개방성과 연결될 수 있고, 그렇다면 산만함은 단점이 아닌 잠재력일 수 있지 않을까(정지돈). 정말 문제는 산만함 자체가 아니라 산만한 의식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서이지 않을까. 생의 뻑뻑함은 산만함을 더 적극적으로 육성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근데 명상을 하면 답은 못찾고 질문만 계속 많아지는 걸까...


선생님은 다른 요일에 영성독서모임도 하고 있으니 관심 있으면 참여해보라고 하셨다. 생각해보겠다고 말하며 인사를 드리고 센터를 나왔다. 오후 한시쯤 되었다. 날씨는 맑았지만, 조금 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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