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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경덕 Mar 14. 2018

밥은 먹고 다니냐

3년동안 하던 일을 그만두었다. 이 참에 제대로 푹 쉬어야지, 하고 돈 되는 활동을 무기한 유예했다. 모아둔 돈으로 월세를 내고 장을 보고 가스비를 냈다. 수도와 전기세도 냈다. 통신비, 교통비, 그 외 소비를 더하여 최저 생계비를 계산하니 월 50만원 정도 나갔다. 이정도면 앞으로 반년 이상 안정된 백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겠다 싶었다. 순도 100%의 백수 신분이었다. 모처럼 내 앞에 펼쳐진 텅 빈 시간 속으로 퐁당 뛰어들었다. 하루 하루 꿀같은 허송세월을 보냈다.

출퇴근 없는 일상은 의식의 흐름에 내맡긴다. 눈이 떠지면 일어나고, 감기면 눕는다. 배고프면 밥을 먹고, 마려우면 싼다. 볕이 그리우면 나가고, 추우면 들어온다. 집 안에서 형광등 불빛만 쬐다가 삼일 만에 밖에 나간 적이 있는데, 그 때 마주한 태양 빛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온유했다. 얼굴을 감싸는 은근한 볕에 고슬고슬해지는 콧잔등, 눈 감았을 때 붉게 퍼지는 색채가 따스했다. 그 느낌이 좋아 해바라기처럼 한동안 서있었다.

백수도 밥을 먹는다. 아니 더 잘 챙겨 먹는다. 시간이 많으니 매 끼니를 해 먹었다. 1인분 경제학에서는 쌀과 반찬으로 집안 경기를 확인한다. 넉넉한 쌀 포대를 보니 경기 호황이다. 하루는 애인이 몸이 안 좋다고 하여 죽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두 번째 칸에 있는 단호박 하나가 눈에 띄었다. 순간 머릿속에는 죽 전문점 메뉴판에 있을법한, 윤기 좔좔 흐르는 노오란 단호박죽이 그려졌다. 단호박이 단호박죽이 되기까지 어떤 단계를 거쳐야 하는지 모른 덕분에, 섣불리 단호박을 꺼낼 수 있었다.

레시피를 찾아 보니 단호박을 믹서기에 갈아야 하나보다. 믹서기는 없지만 왠지 적당한 도구로 꾹 꾹 눌러도 뭉개질 것 같아서 게의치 않았다. 잡곡도 섞기 위해 미리 물에 불려 놓고, 단호박은 전자레인지에 통째로 넣어 5분 동안 돌렸다. 살짝 익은 단호박을 도마 위에 올려 반으로 갈랐다. 씨를 바르고 조각 조각 썰어 냄비에 넣고 물을 부어 끓였다. 그 동안 불려 놓은 잡곡을 숟가락 뒷면으로 꾹꾹 눌러 으깨고, 끓고 있는 냄비에 같이 넣어줬다.

단호박은 국자 뒷면으로 눌러 주었다. 한 조각, 한 조각, 지긋이 누르고, 또 눌렀다. 째깍 째깍 시간이 흐르고 오른 팔 근육이 뻐근해질수록 단호박 조각과 따로 놀던 멀건 국물은 노오랗고 걸죽한 죽이 되어 갔다. 바닥까지 휘휘 저으면서 잡곡과 단호박 국물이 사이 좋게 섞이는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점도가 높아지니 표면에서 터지는 거품이 냄비 바깥으로 튀기 시작했다. 뚜껑을 덮어 놓고 한 동안 더 끓인 후에 불을 껐다.

꽤 그럴듯한 풍미의 단호박 죽을 완성했다. 2인분 정도 생각했는데 네 명이 먹어도 부족함 없는 양이 되었다. 이전에 미역국 끓일 때도 한 줌의 미역이 물을 먹고 무지막지하게 불어나는 모습에 경악한 적이 있다. 미역 줄기들은 자기들끼리 얽히고 설키며 몸을 키우더니 냄비를 통째로 점령했고, 그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기괴하여 미역 괴불이라 부르기도 했다. 덕분에 며칠 동안, 매 끼니마다 미역국이 밥상에 올라왔다. 미역에는 못 미치지만 완성된 단호박죽은 생각 이상으로 푸짐했다. 애인과 함께 그 노오란 풍미를 음미했다.





얼마 전에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봤다. 주인공 혜원은 팍팍한 도시 생활에 지치고 임용 시험 낙방에 좌절하여 무작정 시골에 내려온다. 엄마와 함께 살았지만 지금은 비어 있는 시골집에 돌아와 가장 먼저 해야 했던 일은, 끼니 해결이다. 도시든 시골이든 배고프면 먹어야 한다. 쌀독은 텅 비어 있고, 마땅한 식재료도 없는 상황. 눈이 소복히 쌓인 텃밭에서 우연히 발견한 배추를 들고와 배추된장국을 끓인다.

주변의 재료로 되는 대로 차린 상 위에 김이 모락 모락 나는 배추국 한 사발이 올려져 있다. 첫술을 뜨며 식사를 시작한다. 혜원의 배추국 먹는 소리와 관객들의 입맛 다시는 소리가 섞여 질척한 하모니가 만들어진다. 마지막 국물 한 방울까지 후루룩 들이키고 만족스런 표정으로 말끔히 비워진 사발을 내려놓는 혜원의 모습에서, 한 생명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윤리를 본다. 밥은 먹고 다니냐는, 지겨운 안부는 그래서 계속 반복된다.

며칠 전부터 다시 일을 시작했다. 오전 6시부터 8시까지 두시간 파트타임으로 카페 오픈 전에 매장을 청소하는 일이다. 오늘은 출근 전에 시루떡과 커피 한 잔으로 상을 차렸다. 옆집 아주머니가 얼마 전에 제사 음식 남았다며 주신 음식이다.


첫 끼니를 잘 해결했고, 괜찮은 하루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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