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이 없던 시절. 친구를 만날 수 없는 상황에서 유일한 소통창구는 전화였다. 특히 각 집에 1대만 있었던 것이 보통이었던 시절에는 다소 긴장감까지 느껴지기도 했다. 친구가 바로 받으면 좋은데 꼭 친구 부모님이 먼저 받으시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언제나 정중하게 내 이름 석 자를 밝히고 친구를 바꿔 달라고 했다. 그런 통과의례를 겪은 후에 신나게 통화를 했다. 때론 몇 시간 동안이나 해서 각자의 부모님에게 핀잔을 듣기도 하면서.
핸드폰이 흔해지기 시작하면서 어느 순간 그런 통과의례는 사라진 것 같다. 핸드폰에 이미 저장해놓은 번호가 액정에 이름으로 뜬다. "여보세요?" 라는 말보다는 전화한 사람의 이름부터 부르거나 바로 "무슨 일이야?"부터 나오게 되었다. 이미 전화를 받기도 전에 누가 전화하는지 알게 된 시점에서는 상대방이 누군지 전혀 궁금하지도, 기대가 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액정에 뜬 이름으로 인해 전화가 온 것을 알면서도 애써 무시해버린다. 거북한 대상의 전화는 달갑지 않은 법이다. 무시한 것이 맘이 걸릴 때에는 바빠서 미처 못 받았다는 핑계의 메시지를 던져 놓음으로 갈음한다.
이런 것 때문인 걸까. 아니면 바로 통화를 하기에는 곤란한 상황에 놓이는 경우가 많아져서일까. 어느 순간부터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편해졌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전화가 편하지만 상대방이 때로는 전화를 불편해해서 어느 순간부터 "전화 가능해?" "통화할 수 있어?"라는 메시지부터 먼저 보내고, 상대방에게 괜찮다는 답문을 받아야 통화버튼을 누르게 되었다. 이 일련의 과정이 통화를 하기 위한 통과의례처럼 되어 버렸다. 예전에는 내 이름 석 자를 밝히는 것이 먼저였는데, 지금은 통화를 허락받는 것이 먼저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더 접할수록 전화는 하기 힘들어졌다. 핸드폰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이 통화건만 그 통화를 하기에는 넘어야 할 장애물들이 너무 많아졌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을 수 있는지의 여부, 상대방이 나의 전화를 받고 싶어하는지의 여부, 상대방이 전화를 하는 것을 좋아하는지의 여부. 나는 너무 많은 것들을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타인은 나와 다르기 때문에. 그럴수록 메시지를 보낸다. 상대방의 상태에 구애 받지 않고, 언제가 답을 받을 수 있고, 필요에 따라서는 따로 예의를 차리지 않아도 대화는 단절시킬 수 있다. 모든 면에서 메시지는 훨씬 간편한 동시에 무례함조차 용납된다.
그래도 나는 메시지보다는 상대방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더 좋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한다.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가꾸고, 풍성하게 만드는 것 중에 이따금 주변에게 하는 안부전화가 얼마나 좋은지를 설파한다. 나는 이미 10년도 더 전에 그 이야기를 들어왔다.
무엇보다도 코로나19가 만연해있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한 것은 사람의 목소리이고, 서로의 안부를 물어주는 것이라고 계속 생각해왔다. 만나기 어려운 상황에서 메시지로는 상대방의 온기를 느끼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 역시 어느 순간부터 전화는 망설이게 하는 무언의 것이 되어 있었다. 생각이 많은 나는 나의 전화가 폐가 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나의 전화가 사실은 반갑지 않으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은 전화를 할 엄두를 나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며칠 전에 유튜브를 통해 들은 그 안부전화에 대한 권유는 나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나는 언제든 전화를 하고 싶었고,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으며 무언가를 공유하고 싶은 맘이 컸기 때문에 안부전화를 망설이고 있던 나에게 충분한 도화선이 되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정말 오랜만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고, 받지 않았다. 그래서 단념하고 있었는데 약 1시간 후에 전화가 왔다. 전화가 온지는 알고 있었는데 받기엔 어려운 상황이었다며 이제서야 전화한다는 답에 마음이 놓였다. 서로의 근황을 묻고 나니, 순간 무엇을 이야기해야할지 몰랐다. 갑자기 찾아온 침묵은 당혹스러움 그 자체였다. 그래서 서로 코로나19가 언제 끝날까, 언제 마스크를 벗을까라는 이야기들, 통화하고 있는 우리 둘의 이야기가 아니라 서로 알고 있는 지인들의 이야기를 했다. 누가 결혼을 했다더라, 누가 이직을 했다더라, 부모가 됐다더라... 이런 이야기로 내 안부전화가 채워져갔다. 그 순간순간에도 찾아오는 순간적인 침묵에 친구도 나도 말하지 않지만 곤란함을 느꼈다. 언제 시간이 되면 보자는 인사를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이제는 상대방과 통화를 할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인 걸까. 차라리 메시지가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메시지였다면 훨씬 더 좋은 느낌으로 마무리지었을 것 같았다. 내가 안부전화로 느끼고자 했던 따뜻하고 서로의 감정의 공유란 것은 의외로 어려운 것이었다. 이게 이렇게 어려운 것이었다는 것에 황망스럽기까지 하다. 생각해 보니 그 친구와는 항상 만나서 신나게 놀고 떠들고는 했어도, 집에 돌아와서 통화한 경우가 몇 번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상대방을 잘못 선택한 것일까. 무엇이 문제였던 것인지 모르겠다.
그래도 다시 한 번 핸드폰에 저장된 수많은 연락처를 본다. 또 마음이 동해지면 한 번 더 안부전화에 도전해 봐야겠다. 만나기 쉽지 않은 이때에, 점점 더 삭막해지고 메말라간다는 느낌에 좀 더 발버둥치며 벗어나 봐야겠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안부전화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어색하지 않게 서로의 안부를 궁금해하고, 다음을 기약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