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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 Sep 21. 2022

이과 감성 페인터의 그림 번아웃 극복기

01_그림을 좋아한 이유

생일 선물로 무엇을 받고 싶냐는 물음에 컬러링북을 사달라고 했다. 나 자신을 위해 아무 생각 없이 그림을 그려본 것이 너무 오랜만이다. 정확히는 그림이 아니라 색칠놀이지만 말이다.


여행을 가는 것이 왜 좋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나는 새로운 곳에서 기분전환이 되는 것이 좋다고 했다. 그러면 반대로 일상 또한 여행처럼 새롭게 만들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물음이 되돌아왔다.


그리하여 여름이 다시 돌아왔나 싶을 만큼 무더웠던 오늘, 나는 캐리백에 수채 도구와 선물 받은 컬러링북을 주섬주섬 담아 들고 동네 카페로 여행을 떠나본다.


카페에서 그림을 그리는 건 여행 중에 한 이후로 세 번째이다. 수채 도구는 가게 측에 약간의 협조를 얻어야 한다. 수돗물을 물통에 채워달라는 부탁(미리 채워갈 수도 있긴 하겠지만)을 하고 가져간 신문지를 펼쳐 컬러링을 시작한다.


컬러링은 색연필이나 사인펜, 마커 등을 이용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수채물감을 고집했다. 어릴 때부터 수채화를 싫어하던 내가 이제는 그 맛에 빠져버렸다. 그렇다고 딱히 잘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더 몰입하게 되는 것이 묘미이긴 하지만 말이다.


컬러링을 하고 있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내가 그림을 좋아한 이유와 내가 언제부터 효율성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는지의 상관관계를 생각해본다.



그림을 좋아한 이유, 인생 최초의 '몰입' 


내게 왜 그림을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내 인생 최초로 ‘몰입’을 경험한 기억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릴 때는 그림이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가 어른이 되어가면서는 그러지 못하게 된 것 또한 같은 이유다.

내가 그림에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못했다.

그림을 그리는 것에 이유가 요구됐고, 그림에 정답이 매겨졌다.


그림에는 정답이 없다.

마찬가지로 인생에도 정답은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사회화를 거치는 과정에서 획일화된 인생 스토리를 주입받고 반복적으로 세뇌당한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다 사라지기를 몇 차례, 나의 첫 컬러링이 완성되었다.

카페 사장님께서 지나가며 보시곤 예쁘다며 웃어주신다. 주말이라는 특수를 이용해 이런 활동에 시간을 소비하는 것이 참 오랜만이다. 앞으로는 주에 한 번이라도 컬러링 작업을 통해 내면의 자아와 대화하는 시간을 마련하고 지켜내려 한다.


내가 효율성을 추구하는 건 결국 이런 몰입의 시간을 더욱 즐겨내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모처럼 느긋하고 마음이 충만해진 주말의 끝이었다.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은 멀리에 있지 않다.

거창한 목표를 추구하는 것도 근사하지만, 동시에 눈앞에 떨어져 있는 반짝반짝한 조약돌들에 눈길이 팔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생각해본다.


시작은 작게 할수록 좋다.

그것이 끈기 있게 오래가는 비결이다.


지금 내게는 열정이라는 미명 하에 구겨졌던 마음을 다리미질하듯 주름을 펴 판판하게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다. 오늘 나는 그 다리미에 예열을 했다.


*컬러링 이미지 출처: 도서 <윌리엄 모리스 패턴 컬러링북>, 초록비 책공방 출판

*본 포스팅의 이미지 사용은 도서 저작권자의 허락을 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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