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_ 프리 라이팅으로 나의 무의식을 만났다
내가 번아웃이 왔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체력적인 한계, 쉴 줄 모르는 비생산적 업무습관, 노력 대비 당장 떨어지는 것이 없는 성과 등도 주요 요인이었겠지만 번아웃이란 결국 정신의 문제이기에 근본적인 내면의 원인을 찾아보려 했다.
나는 '팔리는 그림', 즉, 다시 말해 '사람들이 찾는' 수요 있는 그림 위주로 작업을 했었다. 물론 그것은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사람들이 찾는 테마에 나만의 색을 입혀 그림 작업을 했고 그것은 영리한 전략이라고 나는 믿었다. 어느 정도 먹히는 전략이기도 했다. 그리고 작업 초반에는 그러한 초심을 잃지 않았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마음속에서는 한 가지 생각이 똬리를 틀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일로 돈 벌자고 시작한 일인데, 결국 남 좋은 일 하고 있잖아? 그것도 남의 밑에서 급여받고 일할 때보다 더 헐값으로.’
또한 앞으로 얼마나 더 이런 식의 작업을 이어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던 것도 한몫했다. 나는 내 그림으로 장사보다는 사업을 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브랜딩 구축이 필요했다.
나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나는 여러 고민도 해보고 관련 강의도 기웃거려봤지만 어려웠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던 거라고는 고작 브랜드 컬러, 타깃 니치, 주력 아이템 이런 것들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물론 사업과 브랜딩을 위해 이런 것들은 필수다.
그런데 그 이전에 나 자신에 대한 이해가 가장 먼저 시도되었어야 했다.
나는 무엇을 원하지?
나는 어떤 이야기를 꾸준히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싶지?
브랜딩이란 결국 한결같은 이야기를 다양한 형태의 변모를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들었던 강의에서 이런 메시지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근본이 없는 기술은 얕은 재주에 불과하다.
그러다 사업에서 정체기를 맞았을 때 우연찮게 프리 라이팅(Free-writing)이란 것을 접하게 되었다.
"프리 라이팅(Free-writing)은 글씨나 맞춤법을 신경 쓰지 않고 써 내려가는 글쓰기 방법이다. 이는 브레인스토밍과 맥락이 비슷하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머릿속에서 흘러나오는 생각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종이에 적는 것이다. 처음에는 멈추지 말고 10~15분 정도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글로 옮겨라. 멈추지 않고 쭉 써나가는 게 중요하다.
처음에는 논리적 구성도 맞지 않고, 글도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저 생각의 건더기일 뿐이다. 건더기에 너무 집중하지 말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걸 토해내라. 계속 쓰다 보면 당신을 지탱하던 생각의 뿌리들이 나오게 된다. 이 방법은 작가들이 심리적 요인으로 글이 안 써질 때 이를 극복하려고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다."
-출처: 도서 <웰씽킹>
나는 '나다움에 관하여'라는 주제로 프리 라이팅을 시도했다. 나의 두 번째 프리 라이팅이었다.
당시 나는 비우기 시각화란 것을 통해서 나를 가로막는 생각과 감정들을 비워버리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과거에 나를 기쁘게 했던 기억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말 그대로 희로애락을 초월하는, 도를 닦는 기분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부작용 일지 명현현상인지는 모르지만 비워내는 것에 대한 거부반응과 함께 나다움에 대한 글을 쓰고 싶어졌다.
-'나다움'에 관하여-
나다운 것이란 게 무엇일까. 내 몸은 내가 아니라고 한다면 내 정신이 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 정신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생각들과 감정이 내가 아니라고 한다면? 무엇으로 나를 정의 내릴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 떠오르게 된다.
나다움이란 결국 내가 이래야 한다고 하는 나의 믿음, 즉 나의 에고가 만들어낸 생각이다.
그걸 깨부수는 것이 나다움을 지우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점은 남는다.
그렇다면 남들과 나를 구별 짓는 나만의 독특함, 나만의 특이점은 무엇일까?
생각의 교차로, 중복점으로 볼 때 내 생각이 내가 아니라는 것은 알 수는 있겠다.
그런데 그러면 생각을 하고 있는 나는 누구란 말인가. 결국 이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있는’ 나, 그것만이 온전한 내가 아닐까.
현재를 사는 것,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 이 순간에 집중한 나, 생각의 교차로 속에서 나만의 '다름'을 인식하는 나.
생각과 감정을 빼고도 내게 남아 있는 삶의 '흔적'.
이것들은 내가 아닌 동시에 나를 이루는 부분들이 아닐까.
내가 아니라고 하는 생각들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들이라면 나는 그것들에 감사하고 어루만져줘야겠다. 그래서 사랑과 감사만이 남는 것 아닐까.
나를 부정하는 것은 내게 벌어진 모든 세월의 흔적을 부인하는 것이다.
결국 나란 것은 우주와 세상의 수많은 변수들이 충돌하여 만들어진 집합체가 아닐까.
똑같은 꽃이나 나무는 단 한 포기도 없듯이, 자연의 풍화작용에 깎인 석회석처럼 나란 존재도 세상의 변수 속에서 쓸려나간 흔적들의 집합체가 아닐까 생각했다.
꽃이 진다고 슬퍼하는 나무가 있을까?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온다고 슬퍼하는 생물이 있을까?
물론 인간은 동물의 면이 있지만 완연한 동물만은 아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생각과 감정이 있다는 점이다.
그 생각과 감정을 버리라고 할 때 나는 인간으로서의 내 존재를 부정당하는 것 같아 어느새 거부감이 들기 시작했다.
... 명품을 사 모으는 사람들은 명품의 브랜드 가치를 자신과 동일시하려는 성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어쩌면 생각과 감정을 나 자신과 동일시할 만큼 나 자신이 없는 존재 아녔을까.
나는 내가 '갖고 있다'라고 생각했던 그런 관념들로 나를 대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결국 '나다움'이란 걸 운운할 때부터 내 안에 나는 없는 것이다.
감정과 생각을 빼고도 남는 것은 무엇일까. 나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여기에서 이미 주어로 쓰이는 '나'란 무엇일까. 그것은 자기 인식, 결국 론다 번이 말한 것처럼 알아차림이다.
인식이다. 느끼는 것, 지각하는 것.
나를 나로 알아차리는, 내가 아닌 것을 '남'이라고 알아차리는 것.
생각의 공통분모를 빼면 우리는 모두 하나다.
하나이면서 동시에 갈라진 제각각의 파편들이다. 그 안에는 우월함도 열등도 없다.
생각과 감정은 우월과 열등 사이에 뒤범벅되어 우리를 잠식할 때가 있다.
비우기 시각화를 마쳤을 때 무감정의 상태에서 내가 느꼈던 것은 이 우월과 열등을 벗어난 덤덤함이었다.
그런데 에고란 참 교묘하다. 다시 시간이 흐를수록 차오르기 시작한다.
에고는 5살짜리 내면 아이와 같다.
끊임없이 칭찬을 갈구하고 '나, 나'를 반복한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사랑이 필요하다.
사랑이 필요한 자에게 사랑을 주자.
사랑은 뭘까? 사랑은 행동하는 것이다.
사랑은 서늘하다. 사랑은 따뜻하다.
사랑은 과하지 않다. 사랑은 바라봄 들여다 봄이다.
사랑은 판단하지 않는다.
사랑은 웃는다. 사랑은 기뻐한다.
결국 생각과 감정을 뺀 끝에 오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집중이며 알아차림이고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이고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사랑은 오늘과 내일을 모른다.
사랑은 지금 이 순간에의 집중이다.
사랑은 감사를 수반한다.
사랑은 우리를 지켜준다.
사랑은 나다움을 녹인다.
사랑은 나다움을 녹이지만 나를 자유롭게 놓아준다.
사랑이 곧 나다움이다.
결국 돌고 돌아서 내가 내린 '나다움'의 결론은 사랑이었다. 정말 식상하고 뻔하게 들리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림은 내가 세상을 사랑하는 여러 방식 중 가장 메인으로 삼고 싶은 수단인 것이다.
이 프리 라이팅 작업은 올해 3월에 진행했던 것이다. 이 글쓰기를 마치고 나는 내 무의식이 뱉어낸 말의 앞뒤를 맞추어 보는 작업을 의식적으로 해 보았다.
그것이 당장의 번아웃에 직접적 영향을 주지는 않았지만, 번아웃 극복에 있어 아주 중요한 실마리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내가 다시 그림으로 비즈니스를 한다면 내 브랜딩의 초석이 무엇일지는 이미 정해졌으니까.
*컬러링 이미지 출처: 도서 <윌리엄 모리스 패턴 컬러링북>, 초록비 책공방 출판
*본 포스팅의 이미지 사용은 도서 저작권자의 허락을 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