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_고통이 내게 가져다준 의미에 관하여
어느덧 이 컬러링 챌린지도 습관으로 인지가 되기 시작했는지 오늘은 처음으로 집에서 작업을 할 마음이 들었다. 여기에는 날이 추워진 탓도 있고, 카페로 나갈 만큼의 에너지도 남아있지 않던 하루의 피로도 한 몫 했다. 그리고 그러한 하루의 끝에 힐링 수단으로 떠올린 것이 컬러링 작업이었다. 그렇다, 이제 이것은 나에게 '치유의 습관'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컬러링을 시작하고 처음 얼마간은 설레는 마음으로 패턴 표본에서 벗어나 내가 좋아하는 색을 넣어보기도 하고, 작업 자체에 몰두했다. 집을 떠나 '제3의 공간'인 카페로 향하는 길은 가벼운 소풍길을 가는 기분을 자아냈다. 5회 차가 넘어가고 3주가 경과한 지금으로선 힘듦을 달래줄 일종의 리추얼(ritual)이 되어버렸다.
아, 힘들다. 수채 컬러링 할 때가 되었는걸.
마음속에서 이렇게 인식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장소는 이제 나에게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이제는 익숙해진 작업에 몸을 맡기자 나의 두뇌는 '몽상 모드'에 빠져든다. 은연중에 떠오르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부유하기 시작했다.
내가 왜 수채화를 좋아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본다.
나는 색이 주는 향연이 좋다. 다채로운 색, 그러면서도 서로 조화를 이루어 나의 눈을 즐겁게 하는 색의 아름다움이 좋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어릴 때 드로잉에만 몰두했듯이 나는 흑백과 선으로 대변되는 '형태'에 집중했었다. 서양미술사의 영원한 과제였던 색과 형태 사이의 분리처럼, 나는 '선'이라는 형태에 주로 집중했고 색은 나에게 미지의 세계였다.
그러던 중 이전 글에 썼던 초등학생 시절 수채화의 경험으로 인해 색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수채화를 기피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지만 적어도 그 경험은 내게 색에 대한 임팩트를 남겼다.
그리고 그 임팩트는 내가 재패니메이션에 빠지게 된 십 대 시절에 들어 폭발하게 되었다. 나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통해 색의 향연을 즐기게 되었다.
곧이어 색을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전공을 하지는 않았지만 사회에 나와 편집디자인 쪽에 종사하게 되면서 이러한 욕구는 더욱 커졌다. 디자인은 색과 타이포그래피가 주요 무기니까.
언젠가 이런 말을 들었다. 색 조합 감각을 키우고 싶다면 자연물을 관찰하라고. 실제로 많은 디자이너와 아티스트들이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는 패턴이나 색에서 모티브를 얻곤 한다.
또한 드로잉 실력을 늘리고 싶다면 꽃을 그리라고 하는 글도 보았다. 꽃은 생각보다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내가 돈을 벌기 위해 그렸던 수채화들은 식물과 꽃 그림들이었다. 나는 은연중에 일을 통해 색감각과 드로잉 실력을 트레이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불현듯 내가 잘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설명되기 시작했다. 번아웃이 올만큼 힘들었던 고통, 그럼에도 수채화를 이전보다 더 좋아하게 된 이유 말이다.
아, 나는 '성장'을 한 거였구나.
그 힘듦은 '성장통'이었구나.
그 기쁨은 성장으로 인한 것이었구나.
매일 같은 행동을 같은 수준으로 반복한다고 해서 발전하지는 않는다. 성장은 새로운 차원의 에너지이다. 이는 고통을 수반하기도 한다.
매번 그렇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고통 없이는 성장하지 못하는 단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걸 조카의 갓난아기 시절을 보며 깨닫게 되었다. 치아가 잇몸을 뚫고 나오는 고통을 아기는 감내해야 한다. 그 순간이 분명 아기에게는 시련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 과정을 지나야 아기는 치아가 생긴 형태로 성장을 하고, 씹을 수 있게 된다. 아기가 지난날 치아가 났던 때를 곱씹으며 괴로워할까?
아기는 누워만 있다가 목을 들어 올리고, 기기 시작하고, 걸음마를 떼고 걷기 시작한다. 모든 것이 새로운 챌린지이다. 아기가 넘어진다고 좌절을 할까?
인간에게 자아가 생기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우리는 성장을 위한 단계를 밟기도 전에 그저 고통을 회피해버리려 한다.
나는 오늘의 깨달음으로 고통을 바라보는 시각을 전환하게 되었다. 요즘 읽고 있는 책들의 영향도 한몫하기는 하지만, 스스로 깨달아서 체득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다.
해서 다음 글에서는 고통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더 깊게 다뤄보려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번아웃을 극복하는 마인드셋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마음을 내려놓고 편안한 상태에서 익숙한 작업을 하자 머릿속을 부유하던 생각들이 정리가 되고, 새로운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나의 컬러링 작업도 때를 맞추어 완성되었다.
*컬러링 이미지 출처: 도서 <윌리엄 모리스 패턴 컬러링북>, 초록비 책공방 출판
*본 포스팅의 이미지 사용은 도서 저작권자의 허락을 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