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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 Oct 17. 2022

고통을 재조명해 보자

07_고통이 문제였을까?

오늘은 패턴의 표본을 본 순간 문득 색연필을 컬러링에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채화를 좋아하는 데는 재료가 가지는 물성의 몫도 크다. 나는 수채화 덕분에 '물 맛'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때로 내가 그리려는 그림에 어떤 미디어가 맞는지를 생각해보면 다른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때가 있다.

색연필은 이미 색이 굳어져서 나온 만큼 색 표현이 물감보다는 제한을 갖는다. 물론 각기 다른 색의 색연필을 교차로 사용하면 그라데이션 효과 내지 섞임 효과를 낼 수도 있지만 분명 물감에 비해서 색 표현에 한계가 정해져 있다. 그럼에도 오늘 나는 드라이한 매체가 컬러링에 더 잘 어울리겠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색연필을 택했다.


생각해보면 내가 온라인에서 팔 그림 작업을 위해 수채화를 선택했던 이유도 내가 표현하고자 하던 그림의 느낌을 수채물감이 잘 표현해주리라는 판단 하에서였다. 즉, 나는 보다 '효과적인' 방법을 택했다. 나는 드로잉에 특화되어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펜 드로잉으로 그린 그림을 올려 판매를 시도했다.

'효율성'의 차원에서 보자면 내가 좀 더 자신 있고 잘 그릴 수 있는 흑백의 라인 드로잉을 계속 밀고 나가는 게 맞았다. 하지만 나는 '효과성'의 차원에서 수채화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봤을 때 낫겠다는 판단을 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수채화 영역에서 성장했다.


고통은 피해야만 하는 걸까


효율성의 관점에서 보면 고통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삶일 것이다. 가능한 쉽게, 간편하게. 마치 현대 사회가 개인에게 제공하는 수많은 편의 서비스처럼 말이다. 효과적이라는 건 당장 어느 정도의 힘듦을 수반하곤 한다. 미래의 더 나은 결과를 위해 당장 지루한 일을 하고, 힘든 일을 한다. 발전하기 위해 고통을 감내한다. 고통이란 한계에 부딪힐 때 나오는 장력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고통을 경험했다는 건 스스로를 한계까지 몰아붙였다는 것이다. 한계는 지금 당장은 벽이지만 어느새 내가 뛰어넘을 수 있을 만큼 낮아지게 된다. 내가 고통을 극복하고자 성장하기 때문이다.


고통의 이면에 숨어 있던 감정


고통은 그 자체로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소멸되어 간다. 그럼에도 내 안에 고통의 기억으로 자리 잡은 그 마음은 무엇일까를 생각해보았다. 번아웃이라는 이름의 탈을 쓴 채 나를 멈추게 한 것은 바로 '실패에의 두려움', '불안감'이었다. 나는 실패하는 것이 무척 두려웠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리는 것 같아 겁이 났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그림을 잘 못 그린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날까 무서웠고, 내 그림이 세상에 아무 값어치도 없다는 것이 기정사실화 될 까 봐, 내 인생이 더 이상 달라질 가능성이 보이지 않을 것이 두려웠다.


 우리는 실패에  얼마나 관대할까


이전 글에서 성장에 관하여 아기의 관점으로 풀어보았다. 아기는 실패를 모른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런데 자라나면서 우리가 실패를 두려워하게 되는 원인은 무엇일까.

앤절라 더크워스는 <그릿>을 통해 아이들이 자라는 과정에서 자신의 실수에 대해 부모와 사회가 반응하는 방식을 겪으며 우리가 점점 실패를 부끄러워하게 된다고 역설한다. 실패에 대해 자라오면서 체화한 사회적 양식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실패가 멋진 것이라고, 자주, 더 많이 실패해봐야 한다고 배운 적이 있을까? 정확히 반대이지 않을까.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하고, 대학을 졸업하면 더 나은 직장에 들어가야 하고, 끊임없는 경쟁 구도가 펼쳐진다. 이제는 돈을 버는 것도 경쟁의 시대가 되었다. '가난한 것은 죄악이다', '돈을 가장 벌기 쉬운 시대다'라며 사람들을 현혹하는 문구가 판을 친다.


컬러링 하러 가는 길에 보인 배너. 나에게 필요한 문구들이 자동 수집되는 요즘이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실패를 장려하는 교육과 환경에 노출되었다면 좋겠다는 바람은 차치하고라도, 나 스스로가 나에게 가장 먼저 했어야 할 말을 교회 앞 배너를 통해 보았다. 배너를 본 순간 무언가 안도감이 들었다.


효율성보다는 '효과성'을 따져야 할 때


실패를 인정하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마음이 우선시되어야겠지만, 여전히 그렇다고 고통을 회피할 이유는 없다. 고통은 한계를 맞닥뜨렸을 때에 만나는 필연적인 것이다. 내가 고통스러웠던 것은 성장의 과정에서 당연한 결과였다. 효율성의 차원에서 보면 고통을 피할 이유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투여한 노력 대비 나오는 산출 값이 크면 되기 때문에. 하지만 때로   결과와 성취를 위해서는 어려움과 힘듦을 감내해야 하는 것이다. 효율성을 추구하며 살아온 나로서는 고통은 그저 기피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무엇이  효율적인가를 따지기 보다, 어떤 것이   성취를 이룰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과정에서 다시 잔머리를 굴리고 싶어  만큼 어려움을 맞닥뜨린다 해도   대의를 보며 나아가려 한다.


즉, 꾸준히 지속하기 위해서는 상위의 목적이 있어야 한다. 다음 글에서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꽃과 잎, 줄기는 색연필로 컬러링한 뒤 바탕은 금색의 아크릴 물감으로 마무리했다.


*컬러링 이미지 출처: 도서 <윌리엄 모리스 패턴 컬러링북>, 초록비 책공방 출판

*본 포스팅의 이미지 사용은 도서 저작권자의 허락을 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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