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의 점령(占領)'과 문화예술인 '임화(林和)'
'제4의 점령(占領)'과 문화예술인 '임화(林和)'
- [임화(林和) 연구], 김윤식, <문학사상사>, 1989.
"사람은 누구이든지 '제1, 제2의 점령' 범위 내에서는 자유인 상태에 있다. 즉 말하자면 앞으로 걸을 수도 있고 또한 옆으로도 누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다음 '제3의 점령'은 용이히 자유로운 상태에 나아갈 수가 없었다. 땅에서 조금이라도 높이 뛰어오르려 해도 결국 지구의 인력에 저지되어 얼마 뛸 수 없다. 그러나 당세기에 있어 비행기의 발명은 결국 인류를 '제3의 점령'에서 비교적 완전히 탈출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은 그칠 바를 몰랐다. '제4의 점령'에다 자유해방을 구하여 결국 '예술'을 낳아놓고 말았다."
- 임화(林和), [근대문예잡감], <매일신보>, 1926. 5. 23.
'제1의 점령'은 점(點)이다. 이 공간 아닌 공간에서는 그 어떤 것도 옴짝달싹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자유롭다. '자유'라는 실체적 개념조차도 허락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제2의 점령'은 선(線)이다. 이 공간 비슷한 공간에서는 단 두 가지의 방향밖에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자유롭다. 나아갈 곳이 정해진 바 '자유'라는 말조차도 그렇게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제3의 점령'은 면(面)이다. 공간으로서의 그야말로 이 공간은 나아갈 바가 자유롭게도 많은 현실이다. 그러나 자유롭지 못하다. 현실이란 '자유'라는 어휘 자체도 제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가 없음에 자유롭고 정해진 '자유'이기에 자유로우며 자유롭기에 자유롭지 않은 것 투성이다, 온통.
그러나 아직 하나가 더 남아있다.
'제4의 점령'은 식민지 조선의 시인, 아니 '문화예술인' 임화(林和)에게는 '예술'의 영역에서 자유로이 열린다.
임화(1908~1953), 본명은 임인식(林仁植)이며 보성중학교를 중퇴한 이듬해인 1926년에 위와 같이 '문화예술'에서 '제4의 점령(영역)'을 발견하면서 시와 문학평론을 시작한 인물이다. 그 해 그의 나이 18세였다.
1953년 북조선인민공화국에서 '남로당파' 박헌영 등과 함께 '미제 간첩'의 죄명으로 처형당하기 전까지 임화는 시인, 문학평론가, 영화배우 등의 '문화예술인'으로 살았다. 그것도 사회참여적, 실천적 문예인으로.
"(시인 이상이 취한) 유클리드 기하학은 교과서이다. 이 교과서를 버린 임화에게는 아무런 방패가 없었다. 기댈 곳 없음을 특질로 하는 가출 모티브는 근거없는 것, 무지개 같은 것, '제4의 점령'을 향한 줄달음이 있을 뿐인데, 그 때문에 임화는 그 누구보다도 파괴적이자 현실부정적일 수 있었다."
- [임화(林和) 연구], 김윤식, 1989.
1927년은 '카프(KAPF)'의 '1차 방향전환'의 해였는데, '조선 프롤레타리아 경향문학단체'인 '카프'가 단순한 '문학운동'을 넘어 사회변혁적 '참여문학' 단체로의 전환을 선언한다. 그 내용은 '볼셰비키화' 제창이며, 1925년부터 본격 시작된 '조선공산당' 건설과 함께한다는 의미였다.
'임화(林和)'라는 필명은 1927년 <조선일보>에 '무산계급 전망'을 주제로 한 평론에서부터 쓰기 시작했는데, 임인식의 최초 필명은 '성아(星兒)였고, 초기 경향은 시인 이상과 같이 '다다이즘', '미래파' 등의 '제4의 영역'으로서 '문학'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임화가 1927년 '카프'의 목적의식적 '1차 방향전환'을 목도한 후 1928년 '카프'의 초기 지도자 회월 박영희 등과 교류하고 1930년 동경에서 '무산자파'의 영향 아래 다시 1932년 조선에서 '카프'의 서기장이 되기까지의 궤적은 이전 '모더니즘'적 요소를 버리고 실천적 '경향파' 문학인으로서 '카프'의 '볼셰비키화'를 주도하는 과정이었다.
1929년 임화의 대표작인 단편 서사시, [우리 옵바와 화로], [네 거리의 순이] 등은 '카프' 지도자 중 하나인 팔봉 김기진에 의하면,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대중화의 일환"이었으며, "임화 초기 시작의 배경이던 '다다이즘', '미래파' 등의 요소가 프롤레타리아 시에 '내면의 깊이'와 '외면의 넓이'를 획득하게 했다"면서 이것이 바로 "진지한 의미의 '모더니즘'적 기법"이라고 문학평론가 김윤식 교수는 [임화 연구]에서 평가한다.
당시 '모더니즘'이란 기존 관성에 대한 반발이므로, 초기 '성아' 임인식이든 이후의 '임화'든 결국 '모더니즘'의 영역에 속한다.
"'운동으로서의 문학' 개념에서 볼 때 중요한 것은 조직론(이론)과 창작(실천)이겠는데, 이 경우 실천으로서의 창작은 부분적, 파편적인 것이 아니고 총체적, 변증법적인 것이다. 따라서 시로서는 이를 감당할 수 없다. 임화가 조직이 해체된 1935년 이후에도 계속 '소설론' 및 창작평에 주력한 것은 이로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소설론'에서 문학사랄까 '사적유물론'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이지 시로서는 그러한 문제가 결코 커버될 수 없기 때문이다."
- [임화 연구], 김윤식, 1989.
1935년 '카프'는 공식적으로 해산된다.
1930년대와 1940년대 '카프' 잔당들의 내면 풍경은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임화의 노선으로, 이데올로기와 세계관을 우위에 둔 "작가의 창작과 세계관과의 일원론적 시각"이고(주인공-성격-사상),
둘째는 김남천의 노선인 "정치적 실천에 기인한 작가에 의해 보충되는 창작"으로서 "창작과 세계관의 분리" 입장이며(세태-사실-생활),
셋째는 이기영의 노선, 즉 "단순한 이론투쟁 수준이 아닌 현실적인 창작적 실천"으로서 "창작이 그대로 실천 자체"라는 것이다.
임화의 노선은 "문학과 삶, 예술과 정치의 일원론"은 이른바 '변증법적 사고체계'를 방법론으로 하는데, '가출아'이자 '문제아'인 임화가 1935년 [조선신문학사론 서설]을 통해 관철하고자 한 그의 주된 "사상적 테마"였다.
임화의 문학사에 대한 '변증법적 해석'에 의하면, "전향한 박영희의 '이원론'이나 최서해식의 '체험론'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발전단계의 일환'으로 수용될 수 있는 처지"(서설)라는 것이다.
"... (초기) 이광수 문학은 미숙하나마 한일합방에서 3.1운동 직전까지의 한국(조선)인의 개인과 사회의 합일이라는 사회적인 의식을 문학으로 전위시켜 보여준 것이며, 3.1운동의 실패로 말미암아, 개인과 사회의 관계란 분리되어, 박영희적 관념의 가닥과 최서해적 체험의 가닥으로 분화되었던 것인데, 이 두 가닥을 종합하는 사회의식의 과정에 대응되는 것이 이른바 '신경향파' 문학이었던 것이다."
- [임화 연구], 김윤식, 1989.
'카프' 해산 이후 위와 같은 '창작과 이념의 변증법적 통일'의 관점에서 임화는 '조선 신문학사'를 3단계로 정리하는데, [임화 연구]에 의하면 이는 "주체 재건의 과정"이다.
1단계 [조선문학사론 서설](1935.10~11)에서는 '카프' 해산 이후 그 문학사적 '족보' 작성이고,
2단계 [개설 신문학사](1939.9~11)는 일본제국주의 파시즘의 기세 아래 조선의 신문학사를 정리하는 취지이며,
3단계로 [개설 조선신문학사](1940.11~1941.2)를 통해 제도적 장치로서 '근대성(모더니즘)'을 검토하고 '신문학'도 그러한 장치의 일종으로 파악하는 단계인데, 기존 '프롤레타리아 계급론'에서 '시민 계급론'으로의 전향 단계라는 것이다.
[임화 연구]에서 김윤식 교수의 평가에 의하면, 임화의 위 작업은 "자존심 회복의 차원에서, 즉 세계와 자아(개인)와의 '균형감각'을 찾으려는 임화 자신의 '내면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들이 '자기 재건'의 노선으로 고를 것은 예술적 실천 일반이 아니라 '리얼리즘'적 실천 그것이다."
- 임화
임화의 '리얼리즘 선언'은, '고발문학', '전향문학' 등에 대하여 임화 자신도 [문제는 리얼리즘이다](1938)라고 외친 헝가리 마르크스주의 미학자 게오르그 루카치와 같이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발자크론]에 기대어 주장한 '리얼리즘론'이다.
즉, 지배계급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 발자크의 소설이 오히려 지배계급의 본질을 '사실적'으로 정확히 묘사한다는 엥겔스의 문학비평론은 오늘날 TV '막장드라마'에서 묘사하는 '재벌'의 모습과 그를 추종하는 '서민들'의 판타지가 우리사회 계급성의 본질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과 같다.
루카치에 의하면, 엥겔스로 시작한 마르크스주의 미학은 1) '역사적 유물론'의 일부이고, 2) 그 속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의 적용이며, 3) 그 아래 각각의 문학에서 독자적 법칙이 있음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결국, 당시 '레닌주의'를 표방한 '스탈린주의'로서 '볼셰비키화'를 주도했고 일단의 실패를 겪은 후, 임화의 문학적 "주체 재건의 과정"은 '마르크스주의 미학론'으로의 회귀다.
식민지 말기 잠시 '전향'하여 '문인보국회' 이사로 등재되고, 해방 후 '민주주의민족전선'이라는 통일전선체 활동을 하다가 월북한 임화는 6.25전쟁 후 박헌영을 대표로 하는 '남로당파'와 함께 '미제의 고용간첩' 혐의로 숙청되는데, 아직까지 그 시신을 찾지 못하고 있다.
'카프' 시절 동지인 문학평론가 백철의 증언에 의하면, 임화는 1934년 검거 당시 폐결핵으로 실신하는 연기로 구속을 면했다고 하는데, 백철은 연극도 하고 영화배우 경력도 있던 임화의 '연기력'이 매우 뛰어남을 지적한다.
'다다이스트'부터 '볼셰비키주의자', '리얼리즘론', '전향자'와 '공산주의자', 그리고 '미제 간첩'까지 식민지와 해방정국, 한국전쟁 중 할 것은 다 해본 임화의 '연기력'은 근대 문학사에서는 끊임없이 기존 관성을 부정하는 '모더니스트'였을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제4의 점령'에서 "자유해방을 구하는" 천생 '문화예술인'일 수도 있겠다.
아니면, 시신도 못 찾은 임화가 지금도 죽지 않고 '제4의 점령'을 날아다니고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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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화(林和) 연구], 김윤식, <문학사상사>,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