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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Oct 02. 2020

[150회 기념 서문] '하이드 씨'를 찾아서

- 2020년 10월 '코로나' 추석 보름달 아래

[서문] '집필' 박사의 '하이드 씨'를 찾아서
-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기이한 사례], 로버트 스티븐슨, 송승철 옮김, <창비>, 2013.





"... 두 장면 속 두 인물은 밤새도록 변호사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간혹 잠이 들더라도 그 자가 친구가 자고 있는 집으로 더욱 은밀하게 들어가는 것을 보거나, 아니면 가로등이 훤히 켜진 도시의 미로들이 점점 확대되고 그 사이로 그 자가 이전보다 민첩하게, 그 다음에 더욱 민첩하게, 마침내 현기증이 날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며 모퉁이를 돌 때마다 매번 여자아이를 짓밟은 후 비명을 지르는 아이를 두고 가버리는 것을 보게 될 따름이었다. 그런데도 그 자는 얼굴이 없어 어터슨은 그가 누군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자신의 꿈속인데도 얼굴을 볼 수 없었고, 간혹 얼굴이 보일 때도 누군지 전혀 알 수 없게 눈앞에서 녹아내렸다. 그러자 변호사(어터슨)의 마음 속에 하이드 씨의 진짜 얼굴을 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아주, 거의 비정상적일 만큼 강렬하게 싹트더니 시시각각 커져갔다.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일도 잘만 살펴보면 의문이 풀리고 간혹 문제가 해결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그는 한 번 꼭 그 자를 보았으면 하였다. 보기만 하면 친구의 기이한 선택인지 멍에인지(여러분 좋을대로 부르시라) 하여간 그 이유를, 심지어 유언장에 경악스러운 조항을 넣은 이유를 알게 되리라. 다른 건 몰라도 알아둘 필요가 있는 얼굴이지 않은가. 눈곱만큼의 동정심도 없는 자의 얼굴. 그냥 보기만 했는데도 냉정한 엔필드가 두고두고 증오하게 된 자의 얼굴."
-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기이한 사례], '하이드 씨를 찾아서', 로버트 스티븐슨, 송승철 옮김, <창비>, 2013.





나는 사실, 현대사회를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정신분열'을 겪고 있다 생각해 왔다. 어찌 보면, 자기 스스로의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을 하면서 연명하는 피지배 계급이 다수인 '계급사회'의 본질일 수 있겠다. 근대까지 인류는 솔직한 '폭력성'을 드러내고 살았다고들 하니 돈을 받고 타인의 일을 하는 '임금노동'이 산업화하고 보편화한 현대사회 우리의 '가면'은 더욱 두꺼워지고 커진 것이리라. 낮에 활발히 영업하고 사교하는 '나'와 밤에 공상하고 술마시는 '나'는 같은 사람이되, 장자의 말마따나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경계가 모호한 일장 '호접몽'일지도 모른다.



내 어릴적, 가장 좋아했던 동화소설은 19세기 영국의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 L. Stevenson : 1850~1894)의 [보물섬]이었다. 나는 시시때때로 짐 호킨스가 되어 모험을 한 게 아니라 빌리 본즈 부선장으로부터 촉발되어 외다리도 거대한 배후 그림자도 아닌 존 실버가 장님 퓨와 검둥개 등과 함께 해적들이 전성기를 이루던 '플린트 선장' 시절의 모험 이야기를 부러 상상하곤 했다. 화자인 짐 호킨스는 아직 없던 시절, 이야기와 상상으로만 전해지는 오랜 시절의 이야기들. 지금은 늙어버린 어른들의 옛날 이야기들. 아련하고 빛바랜 이미지로 남은 이야기를 들여다 보길 좋아했다.
어린 시절, TV '어린이 명작동화' 시리즈 또는 마루 책장에 있던 '세계명작동화' 전집과 '세계위인전집'의 노란색 표지는 그런 시공간을 들여다보는 100가지의 '창문'이었다.
물론 그 100권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가난했던 그 오래된 책장 속에는 '문학'이 있었고 '역사'가 있었으며 신화와 과학을 아우르는 '철학'이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문사철(문학-역사-철학)', '인문학'의 보고인 그 책장 앞에 앉은 어린 나는 언제나 주인공이 아닌 '전지적 작가 시점'이었다.

군생활을 전후하여 소설을 쓰고 싶다 생각하던 짧은 몇 년을 보냈다. 많은 소설가들과 작가들을 구경하며 나는 그만치 넓은 안목도 기술도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젊으니까 단편소설 습작도 몇 번 써봤다. 학보사 문학상도, 신문사 신춘문예도 다 안되고 그나마 운좋게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혼자 끊임없이 글이라고 끄적였으나 결국 이 복잡다단한 세상에서 나의 생각을 담은 글에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알았다.

2002년도엔가 우연히 미학자 진중권의 [폭력과 상스러움 - 엑스 리브리스(Ex Libris : 도서관으로부터/책밖으로)]라는 책을 보다가 인류 지식의 보고인 '책'들을 인용하고 소개하는 글을 쓸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하여 나의 글들은 항상 다른 선학들이나 현자의 글을 인용하면서 시작했고 내 미천한 경험의 소산이기에 폭이 넓지는 못해도 그 '공인된' 생각들을 소개하고 내 마음대로 해석하며 주석을 달았다.

로버트 스티븐슨이 [보물섬]을 발표한지 3년 후인 1886년에 나온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기이한 사례(The Strange Case of Dr. Jekyll and Mr. Hyde)]는 '정신분열' 또는 두 개의 '자아'간 '시뮬라크르(Simulacre)'를 이미 근대에 보여준다. '선'도 '악'도 '본질'도 '현상'도 없는 모호한 경계인 '시뮬라크르'의 세계다. 해가 지지 않는' 식민지 모국 빅토리아 영국의 번영 이면에 웅크린 착취와 불평등의 그늘이 외적 배경이고, 개인 모두에게 공존하는 선악의 내적 투쟁이 주제다.

나는 '지킬 박사(선)'의 친구인 '변호사 어터슨'처럼 '하이드 씨(악)'를 찾아 헤매지만 사실 '선악'의 구분은 중요하지 않다. 요점은 우리 안에 웅크린 것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개인마다 그 '내용'이나 형식'은 다르다. 구체적 '표현방식'은 더더욱 다를 게다. 나는 인류의 고전이나 선학들의 사상을 담은 책들 중 '주류'로부터 배제되거나 소외되고 잊혀지는 것들 일부를 '내용'으로 하는 한편, 이 책들에 담긴 글이나 말을 인용하고 내 나름대로 해설하는 '형식'을 통해 내 안의 '하이드 씨'를 끄집어 내기로 했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나만의 구체적 '표현방식'은 바로 '글쓰기'다. 어떤 이에게는 '유투브' 영상으로, 또 내 친구에게는 '노래'로, 내 아들은 '축구'로, 내 딸들은 '그림'으로 각기 다르게 나타나듯.

이런 생각으로 나는 '얼굴 없는' 내 안의 '하이드 씨'를 소환하려는데, 역시 '선악'의 구분도, '본질'도 '현상'도, 심지어는 누가 '나'인지도 모른 채 지낸다. 그래서 대부분 '나'의 상태로 유지하려 노력하는 '지킬 박사'를 장난 삼아 '집필 박사'로 바꿔서 자칭하고 있다.





"책 읽어주는 금융노동자" 송용원은 글을 썩 잘 쓰지도 못하고 더군다나 '박사'도 아니지만 어쨌든, '집필 박사(지킬 박사)'이기도 하고 '하이드 씨'이기도 하며 동시에 '하이드 씨'의 정체를 추적하는 그의 오랜 친구이자 관찰자인 '게이브리얼 존 어터슨'이기도 하다.

나는 '나'의 '분열'을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집필' 박사와 '하이드 씨'의 '기행(奇行)'은 지속된다.


- 2020년 10월 '코로나' 추석 보름달 아래.
"책 읽어주는 금융노동자 송용원(자칭 '집필' 박사와 하이드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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