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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Feb 17. 2023

[민중(Le Peuple)](1846) - 쥘 미슐레

- [브런치 300회 기념서문] 민중의 벗은 누구인가

[브런치 300회 기념서문] 민중의 벗은 누구인가

- [민중], 쥘 미슐레, 1846.





"Vox Populi, vox Dei.

(민중의 목소리가 신의 목소리다)."

- [민중], <2-7. 단순한 자의 본능과 천재의 본능>, 쥘 미슐레, 1846.



1.


스무살이 되었을 때 나는,

여전히 철딱서니 없었지만, 더 이상 내 아버지를 '노무자'라 부르지 않았다.

고등학교 '가정환경조사서'를 쓸 때는 부모님 몰래 아버지 직업을 '노무자'로 써서 내려다가 아버지한테 걸려서 '기술자'로 바꿔쓰기도 했지만, 나는 내심 부끄러웠다.

헛기침하시며 '노무자'를 '기술자'로 수정하던 아버지가 실은 나보다 더 그랬을 수도 있었겠다 생각하게 된 건 그 후로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스무살의 나는,

내 아버지를 굳이 '자랑스럽다' 생각하지는 못했지만, 이 땅의 '노동자'로 생각했고 나 자신을 '노동계급의 아들'로 규정했다.


그렇게 나 역시,

'노동계급'이 될 터였다.



2.


"외로운 몽상가에 불과한 불쌍한 나는 침묵을 지키는 그 거대한 '민중'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 것인가? 내가 가진 것은 내 목소리 밖에 없는데. 이것으로 지금까지 그들을 배제했던 '올바름의 나라'로 그들이 들어갈 수 있게 되기를.

나는 이 책에서 자신들이 이 세계에서 권리를 갖고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했다. 침묵 속에 신음하며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향해 여망을 갖고 상승하려는 사람들, 그들이 나의 '민중'이다. 그들이 '민중'이다. 그들이 나와 함께 가게 되기를."

- [민중], <2-9. 2부의 요약과 3부의 도입>, 쥘 미슐레, 1846.



그렇게 '계급적 각성'을 했다고 해서 내가 뭐 투철하게 '혁명' 운동을 했는가 하면, 그러기에 나는 너무 소심했고 헌신을 진짜 헌 신발짝 만큼이나 가볍게 여겼던지 주변만 기웃거리고 말았다.

그러다가 나는,

결국 '노동자'가 되기는 했다.


내가 생각했던 '노동계급'은 이 땅 '민중'의 대다수이자 선봉대였고, 이십대의 내가 추앙하던 러시아 소비에트 혁명가 레닌의 말대로 '노동계급의 아들'이면서 '배운' 나는 '지식인'으로서 '인민(민중)의 벗'이 되어야 했다. 그렇게 나는 책을 읽었고 '리얼리즘' 소설를 써보겠다며 더더욱 책 속으로 침잠했다.


결국 '혁명'은 커녕 '소설'도 쓰지 못한 나는 지금,

금융노동자로서 '민중의 벗'이 아니라 '민중' 자체가 되었다.





19세기 프랑스 역사가 쥘 미슐레(Jules Michelet : 1798~1874)는 프랑스 2월 혁명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846년에 [민중(Le Peuple)]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그로부터 2년 후 1848년 2월 혁명으로 왕정은  1789년에 이어 다시금 타도되었지만 이 혁명을 이끌었던 자본주의 체제의 지배계급이 된 부르주아지는 2월 혁명의 주력군이었던 대다수 노동계급을 배반했고, 혁명의 국면에서 [공산당선언]을 발표하며 다수 노동계급을 지도할 '공산주의자'의 역할을 강조했던 칼 마르크스는 이후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부터 나폴레옹 3세의 브뤼메르 18일 쿠데타와 파리코뮌까지 이어진 프랑스 '반혁명성'의 역사를 '프랑스 혁명사 3부작'으로 엮어낸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71

https://brunch.co.kr/@beatrice1007/33


칼 마르크스는 혁명의 주체로서 자본주의 체제의 임금노동자를 역사의 무대에 등장시켰다. 이들은 영국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혁명/자본/제국의 시대 3부작'에 의하면 19세기 당시 실제로 대다수는 아니었지만 생산수단의 독점화가 필연인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결국 대다수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의 대전제였다. 그러므로 원래 '민중'은 '과학적 사회주의' 개념은 아니었지만 절대다수가 될 '노동계급' 자체가 바로 '민중'이었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261


쥘 미슐레의 [민중]은 원제가 'Le Peuple(The People)', 즉 '민중' 또는 '인민'이다. 그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정신의 '조국 프랑스'를 되찾기 위해 프랑스 '민중' 모두가 "신념"(같은책, <3-8>)을 기반으로 "사랑"과 "우정", "희생" 같은 덕목을 통해 "정신적인 결속"(같은책, <3-3>)을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시기 국민공회가 확립한 '공교육'을 통해 모든 '민중'이 "모두가 똑같은 정신적인 의자에 앉아있는 '평등의 나라'로서, '궁극적인 나라'로 가기 이전의 좋은 나라"(같은책, <3-9>)를 만들자는 것을 결론으로 삼는다.

'혁명'으로 복권된 미슐레의 '조국 프랑스'는 "올바름의 나라"(같은책, <2-9>)로 표현되고 있는데 '민중'이 주인되는 '권리의 나라'이자 '신의 나라'다.





"중세는 결속을 약속했지만 전쟁만을 주었을 뿐이다. 신에게 두번째의 시대가 필요했고 그는 1789년에 육화되어 지상에 나타났다."

- [민중], <3-3. 결사에 대하여>, 쥘 미슐레, 1846.



미슐레의 '민중'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정신으로 '조국 프랑스'를 재건할 대다수 인민이었다. 이를 위해 미슐레는 당시 프랑스의 경쟁국이었던 영국의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농업국가인 프랑스에 도입된 자본주의 도시화를 "기계주의"(같은책, <1-8>)로 묘사하며 초기 자본주의화되는 프랑스 현실에 "예속"(같은책, <1부> 전체)되어가는 농민과 도시 노동자, 공장주와 상인, 심지어 부자와 부르주아의 처지까지 설명하며 책을 시작한다.

그리고 <2부>에서는 '민중'의 '본능'을 '자연'이라는 주제어로 풀어나가는데 지식인들의 사상은 복잡하지만 '어린이'와 같이 단순한 '민중'의 생각을 뛰어넘을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 예로 '천재의 단순성'과 '비지성주의'를 '민중'에 비유하고 있는데 19세기 '고전'이라 읽어주지 지금 책이 이런 식의 논리를 폈다면 바로 책을 덮고 말았을 게다.

아니 실제로도 여기서 그만 덮을까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나는 읽어야 했다.  자체로 다수 '노동계급'이자 '민중' 일원으로서 '민중' 역사와 기원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민중(인민:people)' 관한 최초의 저술을 끝까지 읽을  밖에 없었다.

미슐레의 [민중]은 서양에서 중세를 넘어 근대에 이르러 하층의 다수 사람들(민중)을 거지나 범죄자로 보는 게 아닌 '공공성'의 담지자로, 나아가 근대적 '신의 목소리'로 여긴 최초의 저작이다. 동양은 이미 기원전 공자의 '인'이나 맹자의 '의' 개념에서 다수 '민중'의 힘을 언급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지배받아야 하는 '백성'이었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192


쥘 미술레의 이 저작은 서양에서 '민중'을 처음 주제로 삼은 고전이기는 하나 그 내용을 보면 거의 한 세기 전 미국 독립혁명 투쟁과 공화국 건설의 사상적 기초가 되었다던 토머스 페인(Thomas Paine : 1737~1809)의 [상식]이나 [인권]보다는 조악하다. 그럼에도 미슐레의 [민중]이 고전인 이유는 지금 읽기에 다소 유치한 내용 때문이라기 보다는 절대군주의 목을 친 프랑스 대혁명의 경험을 토대로 모든 '민중'들이 새로운 세상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당당한 사상에 있다.


이 책의 마지막 <3부>의 핵심어는 바로 '조국'이다.

미슐레가 비록 '조국 프랑스'를 재건할 '민중'으로 프랑스 전체 국민을 포괄함으로써 자본주의 계급투쟁을 간과했다 해도 이 고전의 역사적 의의는 '민중'의 '주체화"에 있는 것이다.



3.


마르크스주의 '노동계급'이나 현대의 민주주의에서 '대중' 개념의 뿌리가 사실 '민중'이다.

미슐레가 추종하듯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은 중세를 넘어 부르주아 사회를 열었지만 더욱 중요한 의의는 다수 '민중'을 '혁명'의 주역으로 처음 상정한 점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체제 분석을 통해 이 '민중'을 필연적으로 다수가 될 '노동계급'으로 구체화시켰다.

이제 현대 민주주의 운동의 확장에 따라 다수 '민중' 사회 전영역에서 '주체화' 가능성 일체를 담지한 '대중(mass)' 또는 '다중(multitude)'으로 치환해서 부를 수도 있겠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130


그리하여,

만약 지금도 '신'이 죽지 않았다면,

가령 그 '신'이 모두의 복지를 증진해주는 '공공성'이라면,

그 '신의 목소리(Vox Dei)'는 '민중의 목소리(Vox Populi)'일 수밖에 없다.


'포퓰리즘'에 대한 염려 따윈,

다수의 '민중', '인민', '노동계급', '대중'의 '주체화' 뒤로 잠시 미뤄둘 일이다.


미슐레의 말대로 '민중'은 '사랑'과 '우정'과 '희생'의 덕목을 통해 '정신적'으로 결속한다.


'민중'의 벗은 다름아닌 '민중' 스스로다.


***


- [민중(Le Peuple ) ](1846), Jules Michelet, 조한욱 옮김, <교유서가>,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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