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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Apr 15. 2023

[에로티즘](1957) - 조르주 바타유

- 에로티즘 : 금기와 위반의 게임

에로티즘 : 금기와 위반의 게임

- [에로티즘], 조르주 바타유, 1957.





"'에로티즘'의 최종적 의미는 '죽음'이다."

- [에로티즘], <13장. 아름다움>, 조르주 바타유, 1957.



1.


불을 켰고 그녀의 피로 침대 시트가 흥건했을 때 그는 겁이 났다.


무척 욕망했더랬지만, 막상 닥쳐보니 떠오른 건 다름아닌 '죽음'이었다. 어쩌면 그녀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의외로 그녀는 침착했다. 처음으로 피를 보았을 때 아마도 엄마한테 배웠을 것처럼 차분하게 침대 시트를 벗겨내어 찬물로 채운 욕조에 담갔다.


'금기(禁忌)'의 선을 함께 넘어 과감한 '위반(違反)'을 시도했고 결국 성공했지만, 마치 '죽음'을 마주한 것처럼 찝찝했던 건 오로지 흥건한 '피'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끼리 낄낄대며 바라 마지않던 '첫경험'은 그에게 '성취'라든가 새로운 남자로의 '탄생' 따위가 아닌 '죽음'과 같았다. 기성 질서에 대한 반란과 기존 금기에 대한 위반을 꿈꾸었던 이십대였지만 막상 겪은 '금기위반' 앞에서 그는 당황했다. 아마도 침착하게 자리를 수습하던 그녀는 속으로 더 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에게 첫 성행위의 의미는 '죽음'이었다.




2.


"성 '금기'의 특징 중의 특징은 성 '금기'는 '위반'에 의해 비로소 밝혀진다는 점이다... 인간의 성행위는 본질적으로 위반이다... 노동행위와 마찬가지로 위반도 인간만의 것이다. 노동행위가 조직적이듯이 위반행위도 조직적이다. 에로티즘은 넓게 보면 조직된 행위이며, 조직된 행위인 한, 그것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 [에로티즘], <9장. 성적 팽창과 죽음>, 조르주 바타유, 1957.



20세기 프랑스 작가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 : 1897~1962)를 읽어보겠다고 생각한 건, 자유방탕한 그가 라스코 동굴벽화에 대해 쓴 글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예술사에 대한 이야기를 읽기 전에 내가 조르주 바타유라는 사람을 전혀 모른다는 걸 알았고 이참에 바타유의 대표적인 저서를 먼저 보겠다고 집어든 책이 바로 [에로티즘(L'Erotisme/Erotism)]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셸 푸코를 읽은 후 했던 나의 다짐을 지키는 게 맞았다는 건데, 20세기 프랑스 사상가들의 책은 읽지 말았어야 했다.

내게는 한 때의 우상과 같았던 철학자 알튀세르의 실망스러운 최후처럼 푸코든 바타유든 대부분 '잡설(雜說)'이었다.


물론, 20세기 초중반을 거쳐 1960년대 '신좌파 운동'의 자유 공간을 통해 울려퍼진 그 '잡설'들이 인류 지성사에 미친 지대한 공헌을 무시할 수는 없다. 기득권 세력인 자본과 종교 이데올로기의 공고한 벽에 본격적으로 균열을 낼 수 있도록 대중을 도왔던 그들의 업적은 실로 위대하다. 그러나 그 좋은 내용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나치게 현학적이고 과하게 포장된 그 언설의 형식에는 당최 적응할 수도, 동의할 수도 없다.


"철학은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이라는 내용을 위해 루이 알튀세르는 너무 난해한 형식을 차용했고,

https://brunch.co.kr/@beatrice1007/254

https://brunch.co.kr/@beatrice1007/142


"불연속성의 무질서에 정합성 부여"라는 내용을 미셸 푸코는 아주 장황하기 그지 없는 형식으로 포장했으며,

https://brunch.co.kr/@beatrice1007/270

https://brunch.co.kr/@beatrice1007/272


그들보다 한세대 정도 윗선배인 조르주 바타유는 그 자유방탕하지만 인류가 기억할만한 좋은 내용에도 불구하고 글의 대부분을 '잡설'의 형식으로 도배했다.


그래도 내용이 형식을 넘어선다는 생각으로 조르주 바타유를 짚어본다면, 그의 저서 [에로티즘](1957)은 당시 유럽의 지배사상인 기독교를 넘어서 '인문학(人文學/Humanism)'을 되찾기 위한 일종의 '르네상스(Renaissance)'이기도 하다. 중세를 넘어 근대를 부른 14~16세기 르네상스에도 불구하고 자본과 기독교가 지배세력으로 굳건히 결탁한 세상에서 다수 민중에게는 다시금 인문학 '부흥운동(르네상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치경제학적으로 '사회주의' 운동만으로 부족했다. 사회문화적으로 대대적인 '인문주의' 반란이 필요했다.

약속은 깨라고 있는 것이고, 금기는 위반을 전제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 자유분방과 방탕문란의 정점이 바로 1960년대 후반 '신좌파' 운동이었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67


세상 모든 일에는 징조가 있는 법, 조르주 바타유 같은 프랑스 사상가들의 역사적 의의는 근대 이후 다시금 발기하는 현대 '인문학'의 '징조'였다고 본다. '에로티즘'을 다뤘다고, 책에서 변태의 시조새 사드 후작을 자주 언급했다고 대놓고 음란서적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내용을 기대했다가는 <1장>도 다 읽지 못하고 불살라 버렸을 거다. 오히려 프랑스 현대철학의 '잡설'이라 간주하는 편이 그나마 마저 읽어낼 수 있는 길일게다.


조르주 바타유의 [에로티즘](1957)은 기존 질서가 세운 '금기'와 '위반'의 '시소게임' 이론으로 볼 때 보편적이다. 그러므로 이 책 [에로티즘] 또한 필연적으로 '철학'에 귀결된다.

성행위와 '에로티즘'의 본질은 흔히 보듯 '동물성'이 아니라 '인간성'에서 찾아야 한다. '노동'과 세속의 세계, 나아가 기독교가 이성적으로 그어놓은 '금기'의 영역은 '에로티즘'을 통해 '위반'되고 신성의 세계로 연결된다. 기독교가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세계를 갈라놓았지만 루시퍼도 원래는 대천사였던 것처럼 애초에 선악은 동일자에 속했다. 기독교 이전 종교와 신화는 '에로티즘'을 불결하게 정의하지 않았다. 그리스 신화에서 세계는 우라노스(하늘)와 가이아(땅)의 교접으로 창조되었고, 사제로서 신녀들은 최음 상태에서 신과 교접했다. 원래 신성했던 '에로티즘'을 불경한 것으로 만든 기독교가 조르주 바타유의 주적이다.


이렇게 그는 '인간성'을 그 본질로 하는 성행위와 '에로티즘'을 복원하고 '위반'을 본질로 하는 '금기'를 정의한다. 제한된 '위반'을 저질러 온 인류의 역사에게 이제 위선 그만 떨라며 대놓고 '금기위반'으로서 '에로티즘'을 외친 자유분방 방탕문란의 정신이 바로 비록 지루하고 장황한 '잡설'에도 불구하고 조르주 바타유의 업적인 것이다.

바타유에게 '에로티즘'은 '금기'와 '위반'의 시소게임이다.



"종교가 아직 우상 숭배의 단계를 벗어나지 않았을 때는 위반 자체가 신성이었다."

- [에로티즘], <11장. 기독교>, 조르주 바타유, 1957.



인간의 '내적 체험'([에로티즘], <1장>)으로서 '에로티즘'의 "최종적 의미는 죽음"(같은책, <13장>)이라거나, '에로티즘'은 "죽음까지 인정하는 삶"(같은책, <서문>)이라는 이 책의 결론적인 테제들은 진짜 그대로의 공포스러운 '죽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피'나 '월경', '시체'와 '해골' 등을 마주하며 느끼는 즉자적이고 자연적이며 공포스러운 '죽음'이라기 보다는 '에로티즘(성행위)'이라는 '금기위반'을 통해 '불연속성'를 본질로 하는 세속의 개체들이 '연속성'을 그 본질로 하는 신성(神聖)의 영역과 소통한다는 의미로서의 '죽음'이다.

'에로티즘'은 '성행위(탄생)'이자 남녀의 결합을 통한 개체의 '소멸(죽음)'이다. 바타유의 비유처럼 테레사 대수녀의 신성 고백조차 성적 오르가즘과 대동소이하다.


시대에 따라 변해왔지만, '금기'와 '위반', '불연속성'과 '연속성', '세속'과 '신성', '탄생'과 '죽음' 등 각 대립쌍들의 소통으로서 '에로티즘'의 변증법은 이제 총체성의 맹주였던 '철학(哲學)'의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간다.




3.


"철학의 시간은 노동 시간, 금기 시간의 연장이다... 전개과정에 있는 철학은 위반과는 대립적이다...

노동과 비교해 볼 때, 위반은 게임이다.

게임의 세계에서는 철학이 붕괴된다."

- [에로티즘], <결론>, 조르주 바타유, 1957.



조르주 바타유는 현대의 철학이 더 이상 총체성의 학문이 아니라 하나의 과학이 되었다고 말한다. 세속의 세계에서 '노동'처럼 인간의 본질적 행위 중 하나가 된 철학은 더 이상 '위반이 아닌 '금기'의 영역에 갇혔다고 본다. 프랑스 사상사에서 조르주 바타유의 영향을 좀 받았을 후세대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는 그래도 '철학자'이고자 했기에, 철학은 과학처럼 '대상'을 갖지 않고 과학처럼 지식을 생산하지 않으며 경계선을 긋고 방향을 설정한다는 정통적인 철학관을 고수했다. 그렇게 "철학은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으로 현실화된다.


https://brunch.co.kr/@beatrice1007/50


선학인 바타유 역시 '과학'이 된 '철학'에서 머물지는 않는다. 그에게 철학은 "금기와 위반의 역사"를 토대로 새출발해야 한다(같은책, <결론>).

'금기'의 학문이 된 지금의 철학 스스로를 '위반'하면서 원래의 전통적인 '총체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잡설'로 가득한 조르주 바타유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인 이유다.



"... 총체적인 문제를 다루는 철학은, 가능하면, 금기와 위반의 역사적 분석에서 새출발해야 할 것이다. 철학은 그것들의 기원에 대한 비판을 근거로, 거기에 반박하면서, 다시말해 철학을 위반하면서, 존재의 정점을 건드려야 할 것이다."

- [에로티즘], <결론>, 조르주 바타유, 1957.


***


- [에로티즘(L'Erotisme/Erotism)](1957), Georges Bataille, 조한경 옮김, <민음사>, 2009.

역시, '빨간책'이지~ ^^*


https://m.blog.naver.com/beatrice1007/223074883620?afterWebWrite=tr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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