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국, 마르크스는 묻고 스미스는 답했다
결국, 마르크스는 묻고 스미스는 답했다
- [애덤 스미스와 칼 마르크스가 묻고 답하다], 이경태, <박영사>, 2023.
"철학적 토론은 없다.
철학적 코뮤니카시옹은 없다."
- 루이 알튀세르, [레닌과 철학], 1968.
1.
20세기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는 지식이란 과학적 발견으로 생기며 철학은 사상의 경향성을 설정할 뿐이라고 했다.
철학자인 그가 보기에도 철학이란 지식 생산 기능은 없이 과학이 발견한 지식을 가지고 싸움질이나 하는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이었다.
1980년에 정신 나가기 전까지 그 철학자는 '이론'적으로 투철한 공산주의자였다.
이십대의 나는,
그의 추종자, '알튀세리앵'을 선망했다.
내가 보기에도,
모든 '철학'적 토론은 같은 대상을 두고도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며 자기 얘기만 하기에,
합의에 이를 수 없었다.
알튀세르의 말대로,
철학적 '코뮤니카시옹(communication)'이란 애초에 불가능했다.
2.
"나의 경제학은 자본이 아니라 인간을 중심에 놓고 있지. 경제를 움직이는 주체는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경제인, 즉 'homo economicus'라는 것이 대전제로 설정되어 있지... 자본이 경제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고. 자본은 수단에 지나지 않아."
- [애덤 스미스와 칼 마르크스가 묻고 답하다], <1부>, 이경태, 2023.
"[국부론]은 내가 [자본론]을 쓸 때 반면교사, 타산지석의 지적 깨우침을 선물해 준 고마운 양서네. 자네는 자본주의의 운동법칙으로서 '보이지 않는 손'과 '자연조화설'을 제시했지. 나는 [국부론]을 수없이 읽으면서 내가 목격한 자본주의의 현실 인식과 대비한 결과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추동력이 '잉여가치'와 '노동자 착취'라는 불편한 진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네."
- 같은책, <1부>, 이경태, 2023.
재무부 공무원이었다가 미국으로 유학 가서 경제학 박사가 된 후 국책기관인 산업연구원에서 활동한 경제학자 이경태 선생은 올해 '사실과 상상의 융합'으로서 '논픽션에 기초한 픽션'(같은책, <머리말>) 장르를 내세워 18세기의 애덤 스미스와 19세기 칼 마르크스를 한 자리에 앉혔다.
배경은 결국 인간다운 세상을 꿈꾸었던 업적을 기려 천당에서 둘이 만나 염라대왕의 배려 하에 지금 세상을 주유천하 후 런던의 템스 강가에서 커피 한 잔씩 때리면서 토론한다는 설정이다.
서로 묻고 답하는 대화체 형식인데, 예상되듯 스미스는 자본주의에 기반하고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또는 과학적 사회주의)에 기반하여 현재의 세계경제를 논하고 있다.
[국부론]에서 합리적 인간의 이기심이 사회적으로 작동하면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경제가 '자연조화'되고 발전한다는 스미스의 경제 자유주의 사상에서 그의 '고전파' 후학들은 '시장'의 절대적 힘을 강화시키고 신격화하고자 했지만,
[자본론]을 쓴 마르크스는 스미스가 발견한 '노동가치론'과 '노동분업'이 자본주의 발전의 기본골자라고 보았다.
애덤 스미스의 경제적 자유주의와 칼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가 상호 학술적 계보를 이루지는 않는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에는 [국부론]도 인용되지만 그의 '노동가치론'은 스미스의 후학인 데이비드 리카도의 정치경제학 이론으로부터 더 큰 영향을 받았다.
두 사람의 시대는 한 세기의 차이가 나고 스미스의 산업혁명기 시대는 마르크스의 시대와 비교해 노동이 착취되는 양상이 다르다. 그러므로 이 책의 설정처럼 둘이 서로 '자네'라 부르며 각자의 사상을 주고받는 것은 넌센스임에도, 저자는 '자본주의(스미스)'와 '사회주의(마르크스)'의 차이와 장점들을 융합하여 우리식으로 '제3의 길'을 모색하고자 굳이 두 인물을 동시에 소환하고 있다.
'자본주의'라는 말은 1902년에 베르너 좀바르트라는 독일 경제학자에 의해 널리 회자되었다고 한다. 즉, 'capitalism'은 학문적으로 18세기 스미스에게는 그냥 '경제학'이었고, 19세기의 마르크스에게는 당대 '정치경제학'적 분석대상이었을 수도 있다.
18세기 스미스의 시대는 '경제학'이 '윤리도덕철학'과 구분되지 않은 시대라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의 이기심을 인간윤리도덕과 법적 통제로 보완하자고 주장했고, 과학이 좀더 발전한 19세기 마르크스 시대에는 '경제학'이라는 독립된 과학이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므로 '과학적' 사회주의 사상가 마르크스는 '정치경제학'으로 '경제학'을 다시금 대체하고자 했다.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은 경제라는 하부구조가 정치라는 상부구조를 규정하며 양자는 상호 변증법적으로 엮여있다는, 이른바 우리 80년대식으로 표현하면 '사회구성체론'이었다.
정리하면, 스미스의 경제학의 주제는 이기적이지만 합리적인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이었고,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의 주제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사회구조'(social structure)였다.
시기는 달랐으나 '자본주의'라는 같은 세상을 두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라는 동일한 지향점이 있었지만, 스미스는 인류의 '자연조화'를 믿었고 마르크스는 '계급투쟁'의 역사를 보았다.
이 책에서도 두 사람 사상의 차이점을 우선 확인하고 미국의 자본주의, 구소련과 중국의 짝퉁 사회주의를 각자 비판하면서 급기야 <6부>에서는 한반도에 모여 스미스가 남한의 재벌중심 자본주의를 개조하고 마르크스가 북한의 사회주의 사칭 김씨 봉건왕조를 혁명하면서 선의의 '체제경쟁'을 외친 후 마지막 <7부>에서 작별의 건배를 들기까지 하지만, 결론적으로 두 사상의 '철학적 토론'은 없었다.
결국 한반도 통일방안 또한 '연방제'로 귀결된다.
"이해관계자 상생은 자본주의의 장점인 효율을 다소 희생하더라도 자본주의의 결점인 불평등을 현저히 개선할 수 있는 대안임이 분명하네...이해관계자 상생은 분배과정에서의 기업과 시장의 역할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보려는 시도이지. 공정분배 기능을 시장기구 내부에서 작동하는 내생변수로 끌어들이자는 것이네. 평등사회의 실현을 정부, 종교단체, 시민사회의 책임으로만 돌리지 말고 기업의 경영목표로 내생화하자는 것이지."
- 같은책, <6부>, 이경태, 2023.
"협동조합체제도 생산수단은 공유하면서 사유재산을 부정하지만 공동생산에서 나온 산출물을 시장에 내다 팔고 그 대금을 조합원들이 공평하게 나누어 갖자는 것이니까 시장가격기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닐세. 시장경제에서 발생하는 사유재산의 폐단과 불공평한 분배를 시정하자는 것이지."
- 같은책, <6부>, 이경태, 2023.
이상은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첨단을 누리는 '디지털' 기술혁명의 놀랍고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공유한 두 사상가가 이 '디지털' 기술혁명을 기반으로 하여 이 책에서 내린 주요 결론들이다.
스미스는 기업이 효율만 따지지 말고 자본가와 노동자, 대기업과 중소기업, 협력업체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함께 장기적으로 자본주의 불평등을 공정하게 완화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이해관계자 상생' 전략을 내건다.
마르크스는 구소련 공산주의 등이 실패한 국가주도 중앙계획경제가 아닌 노동자 자치의 공유제를 통한 '협동조합'들이 '디지털' 기술혁명에 기반한 실시간 '계획경제'를 실현하고 한편으로 시장기구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공정하게 경쟁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자본론]과 [공산당선언]의 궁극적 결론)를 꿈꾼다.
이 책 내내 두 사람은 열심히 토론하고 건배로 끝내지만 사실 서로 자기 얘기만 하고 끝난다.
역시,
알튀세르의 말대로 "철학적 토론은 없었다."
3.
"환경에 적응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의 법칙은 생명체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닌 제도와 사상에도 적용된다고 믿네. 자본주의는 비판을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유연한 체제이기 때문에 수백 년 동안 번성하고 있지."
- 같은책, <7부>, 이경태, 2023.
사실 내가 읽기로 이게 이 책의 결론이다.
자본주의는 체제 자체에 내재된 주기적 공황과 외재적 위협인 사회주의라는 '소금' 덕분에 지속 수정발전하며 지금에 이르렀고, 인류는 다시 옛날의 빈곤으로 되돌아갈 수 없으니 조지프 슘페터의 말마따나 '기업가의 창의적 혁신'을 장려하며 생산력를 지속 발전시키고 존 메이나드 케인즈의 정책대로 정부의 '보이는 손'으로 유효수요와 완전고용을 확보하면서 분배를 고르게 이뤄야 한다는 것. 자본주의가 '인간화'되고 혁신하며 적응하고 버텨온 진화론적 '선택설'에 따라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방식도 좋으니 어쨌든 사회주의는 '소금'으로 자본주의에 간 좀 잘 맞춰달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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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애덤 스미스와 칼 마르크스는 서로 자존심 세워가며 문답을 이어가지만, 결국 체제경쟁에서 1패한 마르크스는 물었고 어찌되었든 피묻은 1승을 거둔 스미스는 답을 한 것이다.
인류가 적응하며 다윈주의적 '자연선택설'을 통해 살아남았듯,
자본주의는 온갖 위험과 도전에도 불구하고 '사회선택설'에 따라 살아남았다고.
그러니 과연 이 체제 말고 다른 대안이 있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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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덤 스미스와 칼 마르크스가 묻고 답하다], 이경태, <박영사>,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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