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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Oct 03. 2023

[안사의 난](2016) - 이중톈

- 제국의 '治' ; 興 百姓苦, 亡 百姓苦

제국의 '治' ; 興 百姓苦, 亡 百姓苦

- [안사의 난], 이중톈, 2016.




"그 상황은 실로 '흥해도 백성은 고생이고 망해도 백성은 고생이다(興 百姓苦, 亡 百姓苦)'라는 말과 딱 맞아떨어졌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낙양 '민중'의 고난은 사실 '제국'의 미래가 순탄치 못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단지 당사자들은 아직 그 점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따름이다. 그들은 잘못된 길로 계속 멀어져 가고 있었다. 한 문명이 부패하다가 완전히 몰락할 때까지."

- [안사의 난], <3장. 반란의 전말>, 이중톈, 2016.



이제 기원전후 수백년을 거쳐 세계지도 위 동서양 '데칼코마니'를 찍던 [두 한나라와 두 로마]를 지나 왔으니, 중국 통사 시리즈의 기획자 이중톈의 '전공'인 '제2제국'의 절정 '당(唐)'나라 '제국'을 다시금 돌아볼 때가 되었다.


유발 하라리처럼 이중톈 역시 인류의 역사에서 '제국'이라는 정치체제와 국가제도를 높게 평가한다. '세계의 중심'이 되고자 하는 목적이 있기에 실로 직접 지배할 수 없는 광대한 영토에 폭압만이 아닌 관용을 베풀었고 '전투에서는 져도 전쟁에서는 이기는' 넓은 품으로 다양한 문화를 '용광로'처럼 녹여내며 결과적으로 인류의 문명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빅히스토리' 역사가 유발 하라리는 '제국' 일반으로, 중국 역사가 이중톈은 '제1제국' 한나라와 로마와의 비교를 거쳐 궁극의 '제2제국'인 [수당의 정국]으로 말이다. 이후 송나라와 같은 대제국의 기반은 이중톈에 의하면 이른바 "문화의 항공모함"([수당의 정국], <5장>)으로서 관용과 포용을 갖춘 '당' 제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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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당태종 이세민의 '정관의 치'든, 당현종 이융기의 '개원의 치'든 이 모든 빛좋은 '제국의 치(治)'는 쇠락으로 향하기 전 잠깐 빛나던 찰나였고 그나마 다수 민중의 고생은 변함이 없었을 터였다.


그리하여,

증국 속담 '興 百姓苦, 亡 百姓苦',

즉 '흥해도 백성은 고생이고, 망해도 백성은 고생'이라는 말은 역사의 진리다.

적어도 '황제'와 '제국'이 살아 있는 한.




"그때 거의 모든 사람이 안녹산이 곧 반란을 일으키리라는 것을 알았다.

단지 현종만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그는 모든 조짐을 양국충과 안녹산의 갈등 탓으로 돌렸고 그것이 어쨌든 둘이 작당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행정, 인사, 재정의 권력을 독점한 양국충과 제국 최고의 무력을 갖춘 안녹산의 대립이 장차 '제국'의 분열을 초래하리라는 것은 생각지 못했다."

- [안사의 난], <2장. 잠재된 위기>, 이중톈, 2016.



적어도 근대 민중민주주의와 현대 공화정체제가 정착되기 전까지 '제국'의 중심인 '황제'는 '공공성'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한 번 정당성을 얻은 왕조를 멸하고 새 왕조를 열기 위해서는 그 '공공성'을 보증받을 명분이 필요했다. 대부분 '천명'을 조작했지만 그 모든 시작은 '제국' 내부의 모순이었고 과정은 다수 농민반란이었으며 결론은 '천하' 즉 '공공성'을 훔치는 '찬탈'로 귀결되었다.



무측천의 사후 왕자 이융기는 권력 주변 여인들을 연달아 살해하고 다시금 당나라를 재건한다. 20대 후반의 이융기가 당나라 현종이 되어 713년부터 약 20년간 연 '개원의 치'다. 처음의 그는 자신의 측근인 요숭, 송경, 장열과 우문겸 등의 재상을 두루 등용하며 그 동안 정체된 제국의 제도를 혁신하기도 했다.



그러던 당 현종이 며느리였던 '양귀비'(양옥환)를 온천탕으로 끌어들인 것이 740년이었다. 2년 뒤 연호는 '개원'에서 '천보'로 바뀌었고 이듬해 '천보의 난'의 주역 소그드인 이민족 장수 '안녹산'(알락산;빛)이 입조했으며 양귀비의 먼 친척오빠 '양국충(양소)'이 세족의 권신 이임보의 뒤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양귀비', '양국충', '안녹산' 이 세 사람에 의해 당 제국은 멸망의 길로 치달았다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 중심은 '제국'의 '황제', 당 현종이었다.



"이세민과 이융기, 앞뒤로 시차가 100년 정도 나는 이 두 이씨 황제는 아주 비슷한 경력을 가졌다. 두 사람 모두 맏아들이 아니었지만 정변에 성공하여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한때 '정관의 치'와 '개원의 치'라는 찬란한 역사를 연출했다. 두 사람의 가장 큰 차이라면 이세민은 50을 갓 넘긴 나이에 세상을 떠난 반면, 이융기는 78세까지 장수했다는 사실이다. 상대적으로 이세민의 단명은 '명군'이라는 그의 영광스러운 호칭을 보전시켜 주었지만, 그보다 20년 이상을 더 산 이융기는 그 시간 때문에 '명군'에서 무도한 '혼군'으로 바뀌어 전형적인 이중 인물이 되고 말았다."

- [황제들의 중국사], <당 현종 이융기, 양귀비를 죽인 냉혹한 카사노바>, 사식, 2004.



26세에 기치를 들고 29세에 혁신군주가 된 당 현종이 50대 후반이 되었다. 수양제와 기질적으로 닮았고 찬탈 배경도 비슷했던 당 태종 이세민은 상대적으로 일찍 죽어 그나마 '정관의 치'로 기록되었지만 그 나이보다 더 산 당 현종 이융기는 예쁜 며느리를 강탈해서 '양귀비'로 삼았고, 도박을 잘한다 하여 건달 '양국충'에게 '제국'의 재정을 맡겼으며, '제국'의 '포용'이나 '관용'과는 무관하게 오로지 중앙권력 견제를 막기 위해 이민족 장수를 기용하자는 양국충의 건의에 따라 민족간 국제 브로커 '안녹산'과 그의 사기공범 사사명을 중용했다.

실로 '양귀비'는 현종을 정치로부터 멀리 떼어 놓았고, '양국충'은 중앙정치 독점을 위해 공을 세우는 변방장수들을 내쳤으며, 북동서 일대의 '3진' 절도사가 된 '안녹산'은 거란과 실위, 해족 등 북방민족과 없는 전쟁을 만들면서까지 공로를 조작하면서 승승장구했다.

'공공성'과 무관하게 부정과 부패로 지방권력을 전횡하는 절도사와 변방의 무력을 배제하면서 당시 유일 '공공성'의 상징인 '황제'를 고립시킨 환관권력 등을 키운 국가경영에 무능한 중앙권력의 시작은 '안녹산과 사사명의 난' 즉 '안사의 난(安史之亂)'이었던 것이다.


안사의 난은 비록 755년부터 763년까지 10년도 채 되지 않아 진압되었지만, 중앙권력은 고립되고 지방권력인 절도사 군벌세력은 독립했다. 회흘족 같은 소수 이민족의 반란이 이어졌으며 산동의 소금장수 왕선지를 이은 황소의 농민반란군이 '황금갑옷'을 두르고 당 제국 수도 장안을 점령했다.




"사실 태종부터 현종까지, 심지어 무측천의 시대에도 '제국'의 꿈은 줄곧 세계의 중심이 되는 것이었다. 이런 꿈을 가진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장안은 로마와 마찬가지로 한때 세계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단지 전자는 동양의, 후자는 서양의 수도였을 뿐이다.

변방에서 무공을 세우라고 장려한 것은 그 꿈의 실현을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

- [안사의 ], <5. 당시의 정신>, 중톈, 2016.



그러나 당제국을 멸망시킨 자는 황소가 아니었다. 그의 수하였던 주온이 황소를 배신하면서 '황제'에 붙어 반란의 진압에 협조했고 반란군 지도자 황소는 '혁명'을 완수하지 못한 채 자결했다.



당 제국으로부터 '주전충'이라는 이름을 얻은 주온은 제국의 절도사가 되었고 중앙권력의 환관과 사대부를 전부 몰살시키면서 '황제'도 갈아치웠다.

[오대사] 등의 기사에 따르면 최고의 '살육 황제'였던 '후량 태조' 주전충은 당 제국을 멸하고 '5대10국'의 시대를 열었지만 너무 잔혹한 나머지 아들에 의해 살해당한다.




태평천국운동이 '전공'인 중국 역사가 사식(史式)이 쓴 [황제들의 중국사](2004)에 의하면, '후량 태조' 주전충이나 당 현종 이융기 같은 인생 궤적은 거의 모든 '황제'들의 보편적 본질이다.



"중국 역사상 '황제' 제도는 정말이지 가장 황당한 제도였다. 수많은 직업들 중 어떤 직업에 종사하건 일정한 자질과 조건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오로지 '황제'라는 직업은 아무런 자질이나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누구든 쫓아가 빼앗으면 그만이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장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라도 빼앗아 손에 넣기만 하면 모두들 납작 엎드려 만세를 부르며 섬기려 들었다.

중국 역사서 중 특히 '기전체' 역사가 가장 웃긴다. 그 자가 부랑아가 되었건 도적놈이 되었건 부모형제도 몰라보는 빌어먹을 놈이 되었건 용좌에 단 며칠, 아니 단 몇 시간이라도 엉덩이를 붙이고 있었으면 사관은 즉시 '제(帝)'니 '상(上)'이니 하는 존칭을 갖다 붙이면서 하늘과 땅에 버금가는 덕을 가진, 고금에 둘도 없는 거룩한 분이라며 공적을 칭송한다... 이에 따라 주온 같이 짐승 축에도 끼지 못할 물건조차도 '황제'로 인정하여 '후량 태조'([구오대사], <양서>, '태조기')로 불러야 하니, 이것이 코미디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 [황제들의 중국사], <후량 태조 주온, 황제가 된 살인마>, 사식, 2004.



당제국을 쇠망케 한 '양귀비'와 '양국충', '안녹산'과 '사사명'을 이용하고자 권력투쟁의 한복판으로 중용한 자는 '제국'의 '황제', 당 현종 바로 자신이었다.


'살인마 황제' 주전충을 기용한 자도 당나라 '제국'의 '황제'였다.




또 다른 관점으로,

흥하거나 망하거나 민중들만 고생시키는(興 百姓苦, 亡 百姓苦) '제국의 치(治)'는,

현대의 '공공성'인 '민주주의' 또한 지나친 신화화를 경계해야 하는 다른 한편의 반면교사일 수도 있겠다.


***


1. [안사의 난(安史之亂)], 이중톈 중국사 16](2016),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23.

2. [황제들의 중국사](2004), 사식, 김영수 옮김, <돌베개>, 2005.

3. [두 한(漢)나라와 두 로마(Roma) - 이중톈 중국사 9](2014), 이중톈, 한수희 옮김, <글항아리>, 2016.

4. [위진풍도 - 이중톈 중국사 11](2015),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18.

5. [남조와 북조 - 이중톈 중국사 12](2015),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20.

6. [수당의 정국 - 이중톈 중국사 13](2015),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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