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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일상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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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린 Sep 15. 2020

좋은 기운이 그대에게 닿길.

새근새근 잠이 든 아이가 깨지 않게 까치발로 뒷걸음질 치며 안방 문을 소리 없이 닫았다. 코로나로 첫째 어린이집 휴원이 2주 동안 지속됐다. 써야 될 원고 파일이 컴퓨터 바탕화면에 줄을 섰다. 노트북 전원을 켜자 창문 밖에서 들어온 바람에 가을 냄새가 묻어난다.


며칠 전까지 반팔만 입고 잠들어도 쌀쌀한 느낌이 없었다. 어젯밤은 반팔에 이불까지 몸에 돌돌 말았는데 어깨가 시렸다. 아침, 저녁으로 공기가 서늘하다. 반팔을 입기에는 애매하고 긴팔 옷을 꺼내 입기에는 더운 날이다.

가을 냄새에 심장쯤 있는 걸로 추정되는(?) 차분했던 마음이 붕~하고 뜬다. 목과 가슴 사이가 간질간질하다. 두 발을 땅에 힘껏 내딛고 그네를 탔을 때 최고 높이에서 중력을 아주 잠깐 거슬렀을 때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이럴 때는 홀로 맥주 한 캔을 벌컥벌컥 마시고 시원한 바람 부는 거실에 누워 자고 싶다. 엄마만 보면 ‘찌찌 줘’를 내뱉는 14개월 둘째 덕분에 3년째 금주 중이다.


가을 냄새에 몽글몽글해진 기분을 달래주는 건 인터뷰를 하면서 만났던 사람들이다. 10년 혹은 20년 때론 그 이상. 켜켜이 시간을 쌓아 자신의 이름 석자로 삶을 살아 내 가는 사람들.


기자일을 관두면서 가장 후련했던 순간은 1000명이 넘게 저장돼 있던 휴대전화를 없앴을 때다. 남들은 심심할 때 카카오톡 프로필을 올려본다지만 난 그럴 수도 없었다. 내 개인생활을 드러내면 어디선가 날아오는 참견들 덕분에 마음 가는 대로 프로필 설정도 못했던 지난 나날들. 관계에 지쳤고 사람 만남에 진저리 쳤다.


얼마 전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나온 단어가 귀에 쏙 들어왔었다. ‘불필요한 인간관계를 최소화하는 세대, 살코기 세대’, 인생의 기름기를 쫙 빼고 살코기만 남긴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졌단다. 혼술, 혼밥에 익숙한 세대. ‘딱 나네. 우리 세대 맞네’ 싶었다. 학창 시절에는 박스 채로 생일 선물을 받는 인기 많은 친구가 참 부러웠다. 쉬는 시간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하하호호 10명이 넘는 친구들이 무리 지어 친구 한 명만 바라봤다. 인기 많은 그들을 부러움 50, 질투 50이 찬 눈길로 바라봤다. 나이가 든 지금에서야 ‘인기’ 바위에 부딪혀 사라질 물거품이라는 걸 깨달았지만, 어린아이였으니깐 그때는 그랬다.


휴대폰 연락처에 지금은 100명 내외 사람들이 저장돼 있다. 심심하면 카카오톡 프로필을 올려가며 프로필 사진을 보며 근황을 추측해본다. 최소한의 인간관계에 충분히 만족하며 산다.

일로 주어진 인터뷰를 하며 만난 사람들에게 그들이 살아온 삶, 살아내고 있는 일상을 듣는다. 집에 돌아와 잠들기 전 지난날 나를 반성하고, 내일의 나를 계획한다. 좋다.


가을 냄새 킁킁 맡으며 써 내려가고 있는 내 원고가, 읽는 사람들이 ‘어디서 꼰대질이야?’, ‘고나리질이야’ 하며 읽어내질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내가 적당한 관계 속에 얻어낸 좋은 기운이 글 속에 팍팍 묻어나길. 나의 글재주가 진실해지길 두 손 모아 기도해본다.


자. 이제 원고 마감하자.


*고나리질 : 사람을 통제하고 지휘하며 감독한다는 뜻의 ‘관리(管理)’를 자판으로 빠르게 치면서 생긴 오타인 ‘고나리’에서 비롯된 신조어이다. 지나치게 아는 체하거나, 사람을 통제하고 지적하며 이래라저래라 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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