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과 처지 앞에 그냥 포기하고 말 건가요?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난 아주 어릴 때부터 하고 싶은 것이 참 많은 아이였다. 예쁜 공주 드레스를 입고, 빨간색의 반짝반짝한 에나멜 구두도 신고 싶었고, 우아하게 피아노 연주하는 법도 배우고 싶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내 마음에는 어른 한 명이 자라고 있었는지, 작은 일을 결정할 때도 꼼꼼하게 따져보는 습관이 생겼다. 내가 하려는 이 일이 과연 나에게 유익한가, 무익한가, 시간 낭비인가, 아닌가를 따지고, 계산하고 또 고려했다. 그러나 수많은 나의 고민과 고심 끝에, 어찌 되었든 나는 그 무언가를 '하는' 쪽으로 결정했다.
초등학교 2학년이던가, TV에 나오는 탤런트 언니들처럼 긴 머리에 구불구불한 웨이브 파마가 무척 하고 싶었다. 엄마는 어린아이의 두피는 약하기 때문에 독한 파마약을 쓰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고 하셨다. 그래서 난 열 살 설날이 될 때까지 꼬박 6개월을 기다렸다. 열심히 세배하여 어른들께 받은 세뱃돈과 돼지 저금통에 십 원, 이십 원씩의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 두었다가 기어이 파마를 했다.(미용실이 아닌 집에서 머리를 하는 곳이긴 했지만...) 그때 파마를 해 주시던 아주머니는 '머리를 짧게 잘라야 파마가 오래간다'면서 나의 어깻죽지까지 오던 긴 생머리를 조금 자르는 게 어떠냐고 달콤하게 꼬시셨고, 언제나 가성비를 따지던 나는 그럼 그렇게 하시라고 했다. 난 풍성한 긴 머리의 웨이브가 아닌, 단발머리의 뽀글뽀글한 파마머리를 하고 집에 왔다. 내 나이 열 살에 '인간은 결코 믿을 존재가 아니다'라는 것을 깨닫긴 했지만 어쨌든 난 내 힘으로 파마머리를 하긴 했다.
고등학교 1학년때였다. 이웃의 아주머니가 자신의 초등학생 아들을 어느 미국인 할머니 집에 데려다줄 수 있겠냐는 부탁을 하셨다. 그 미국인 할머니의 집은 우리 집에서 지하철로 40분 정도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사실 공부하느라 한창 바쁜 고등학생이 하기에는 조금 어려운 부탁이었다. 그런데 그분은 나에게 '아이를 데려다주면 너도 그 할머니와 영어회화를 하게 해 주겠다'라고 제안을 하셨다. 난 당시 영어의 매력에 흠뻑 빠져있었다. 외국인을 만나서 직접 말하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마침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그 아이를 6개월간 매주 목요일 오후, 잠원동에 있는 미군 출신 할머니에게 데려가고, 데려오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미국인 할머니는 나에게 미국의 집, 요리법, 인테리어 등이 가득 실린 과월 호 잡지를 한 아름 선물해 주시기도 했고, 영어가 잔뜩 적혀있는 예쁜 포장지안에 들어있는 맛있는 과자와 시원한 음료를 내어 주셨다. 분명히 한국에 있는 집이었는데, 들어가 보면 바닥 전체에 부드러운 카펫이(화장실 바닥에도) 깔려있었고, 이국적인 향기가 났다. 여고생의 눈에 그 할머니의 집은 영화에서만 보던 진짜 미국 가정집이었다. 할머니는 사실 그 애보다 나에게 더 말을 많이 걸어 주셨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남자아이는 간단한 대답 외에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수업을 하던 날, 할머니는 나를 따로 부르셨다. '네가 영어를 꾸준하게 했으면 좋겠는데, 혹시 네 엄마에게 한번 말해서 너도 정식으로 영어회화를 배우면 어떻겠니?'라는 말씀을 하셨다. 하지만 나는 부모님께 영어회화를 꼭 하고 싶으니 회비를 내 달라는 말씀을 드릴 용기가 없었다. 고민을 하다가 고등학교 같은 반의 친구 한 명을 데리고 올 테니, 나도 끼어서 함께 배우면 어떻겠냐는 협상을 제안했다. 영어회화 선생님은 나의 제안을 받아들여 주셨고, 나는 친구와 함께 1년간 영어 말하기 수업을 받을 수 있었다.
대학교 2학년때는 미국에 가고 싶었다. 당시, 부모님은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인 삼 남매의 학비를 대시느라 매우 힘든 때였다. 하필 그럴 때, 난 반드시 미국이라는 곳에서 공부를하고 문화를 경험하고 싶었다. 과외를 여러 개 하면서 열심히 중학생들을 가르쳤지만, 연수비용을 다 마련할 수는 없었다. 부족한 돈에 대한 고민을 하다 '나에게 후원을 해주면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돌아와 훌륭한 인재가 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정성껏 작성하여, 을지로에 있는 인쇄소에서 300장을 출력했다. 그리고 그 300장의 편지를 내가 아는 모든 친구들, 학과 선배와 후배, 교수님들, 교직원 선생님들, 조교 언니들, 교회 집사님들에게 모두 돌렸다. 부모님은 이런 나의 극성을 보다 못해 딱 절반의 비용을 마련해 주셨고, 나는 그 절반의 비용만 지불하고 무작정 미국에 갔다. 인천공항에서 어머니가 내게 주신 돈을 달러로 바꾸니 138불이었다. 미국에 가자마자 2주 만에 그 돈은 모두 썼고, 난 그때부터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 그때마다 신기하게 내 책상 위에는 'from your angel'이라고 쓰여있는 봉투가 올라와 있었다. 어느 날은 40불, 어느 날은 50불이 들어있었다. 또 어느 날은 꼭 필요한 화장품 한 병이 내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기도 했다. 아직도 그 천사가 누군지 알지 못한다. 어느날은 갑자기 아빠의 친구분이 기숙사로 찾아오셔서 미국 서부와 동부 여행비를 주고 가셨다. 그리고 어학연수생으로는 드물게 소액이지만 장학금도 받았고, 심지어 친구들과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다 다친 덕분에(?) 보험금도 나왔다. 난 무사히 공부와 체류와 여행에 필요한 비용을 남김없이 지불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처럼 예쁜 파마머리, 미국인과의 영어회화, 미국 어학연수의 기회 등,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늘 '절망과 희망'이라는 두 가지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하고 싶고, 이루었을 때의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고 싶었으나, 늘 그럴 돈이 없다는 나의 처지에 대한 '절망'이 함께 찾아왔다. 그렇지만 나는 힘든 상황이 주는 부정적 에너지를 온 힘을 다해 밀어냈다. 비록 어설프고, 실수도 많이 하고, 바보 같은 방법이긴 하지만 해 냈을 때 내가 느낄 '기쁨과 소망'을 선택했다. 내가 무언가를 하기 위해 돈을 모으는 과정은 늘 어려웠고, 재정이 마련되기까지 기다리는 것은 피가 마르는 듯했다.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가까스로 원하는 것을 성취를 할 수 있었기에 피곤하고 힘겨웠다. 때로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가정에서 자란 친구들과 나의 처지에 대해 비교하고 비관하며 괴로워하는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어렵게 했건, 쉽게 했건 걔나 나나 똑같이'해냈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나중에 깨달았다.
뭐 하나 거저 되는 것이 없는 환경에서 살아온 내가 배운 것이 몇 가지 있다. 하나는 정말 원한다면 '일단 하는 방향'으로 정하고 가다 보면 언젠가는 도착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겁먹고 포기하는 것은 결국 내 손해라는 사실이다. 다른 하나는 비록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그때에도 '기적'이라는 이름의 행운이 존재하고, '하나님'이라는 보이지 않는 존재의 손길이 내가 그를 향해 기도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인생의 어느 깜깜하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게 될 때에, 외롭고, 절박한 그 순간에도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무섭고 두렵지만, 더듬더듬 터널의 벽면을 손으로 짚어가며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내 발밑에 있을지 모르는 커다란 돌멩이를 '기적' 혹은 '신'의 손길이 손수 치워준다는 것을 믿는다. 급하게 경찰차가 온갖 사이렌을 울리며 그 어둡던 터널 안의 내 앞길을 환하게 비추도록 도와줄지도 모르고 말이다.
앞으로도 수많은 인생의 어려움이 있겠지만, 그때마다 잔뜩 움츠러들기도 하고, 지레 걱정하긴 하겠지만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누구도 해할 수 없는 나의 의지를 사용하여 단 한 번뿐인 소중한 삶을 아름답고 성실하게 가꾸어 갈 것이다. 만약, 오늘 아무리 해봐도 안 되는 것이 생긴다면? 그건 저기 보이지 않는 손길의 그분께 맡겨버리고 난 두 다리 뻗고 푹 자면 그만이다. 내일 일은 내일이 알아서 해주겠지 생각하고, 오늘에 충실하면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