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목소리_화요일 오후 세 시의 오븐_251014
작고 투명한 유리컵을 오른손에 들고 있었다. 라테 잔이라기엔 작아서, '코르타도 잔인 걸까?' 생각했다. 몸통 부분이 볼록한 와인잔 같은 모양에, 내열 유리로 만든 작은 찻잔처럼 가벼웠다. 그 어떤 전용 잔이 아닐 수도 있는데, 자연스럽게 커피와 연결되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세상에 존재할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컵 중에 처음 만난 그것이 신기해서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저 그런 투명함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은 것처럼, 혹은 먼지 한 올도 내려앉지 않은 새 거울 같은 선명함이었다. 내가 쥐고 있는 게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내 앞에 펼쳐진 통창으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고, 유리컵은 그 빛을 받아 진하게 반짝이는 무지개를 보여주었다.
꿈에서 깨어난 후 나는, 그 컵을 들고 무얼 하려 했는지 곰곰이 떠올려 보았다. 고요하고 단정하며, 따뜻한 느낌의 공간과 달리 꿈의 끝이 너무 기괴했기 때문이다. 내가 서 있던 그곳은, 천장과 바닥이 나뭇결이 그대로 살아있는 한옥이었다. 기둥, 가구까지 전체적으로 밝은 톤의 원목이었고, 중앙에는 유리로 둘러싸인 중정이 있었다. 햇볕을 온몸으로 받는 초록빛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는데, 그 존재가 실내 전체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편안하고 포근해지는 것이 기분이 좋았다.
그러다 문득 나는, 빈 컵을 입으로 가져다 댔다. 무언가를 마시는 것처럼.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모든 것엔 이유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말이 스쳤다.
입술에 닿는 순간, 깨지는 걸 느꼈다. 산산조각 난 유리컵 조각은 어느새 내 입안에 가득했다. 침을 삼킬 수도 없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뱉어내면서도 입안 가득 상처가 날 것이고, 뱉지 않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이상하게도 아주 또렷했다. 뱉는 게 쉽지 않았던 건, 그 유리 조각들이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조각조각 뱉을 수 있는 게 아니라 마치 커다란 얼음덩어리를 토해내듯 그대로 뱉어내야 하는 것만 같았다.
그 상태로 여기저기 다녔다. 도와줄 사람을 찾는 건지, 무얼 찾는 것인지 모르나 막 정신없이 이리저리 다녔던 것만 기억난다. 그러다 깨어나기 직전에, 겨우 뱉어냈다. 입가를 스쳤던 유리 조각이 아직도 생생하다.
왜 이런 꿈을 꾸는 것일까, 하루 종일 심란했다. 내 무의식은 내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걸까, 그게 궁금했다.
매일 꾸는 꿈을 대부분 기억한다. 그중에서도 이렇게 생생하고, 내게 어떤 신호를 보내는 것만 같은 꿈은 기록한다. 그리고 나를 들여다보는 편이다. 나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혹은 숨기고 있는 그 어떤 것을 알아차리기 위해.필요할 때 만나게 되는 것이 있다. 필요한 줄도 모르다가 나중에 돌아봤을 때, 아- 그때 내게 꼭 필요했던 거구나, 깨닫게 된다. 이 꿈을 꾸기 전 약 한 달 동안 비슷한 대사를 반복해서 들어왔다. 봤던 드라마를 다시 보는 걸 좋아한다. 집중해서 시청할 때도 있고, 틀어넣고 그림을 그리거나 다른 작업을 할 때도 있다.
지난 한 달간, 4~5편의 드라마를 보았다. 불멸의 끝을 내고 싶은 도깨비와 그의 신부 이야기. 다중인격장애를 소재로 한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다양한 면과 대면하는 이야기. 타임슬립을 하게 된 조선 '열녀'의 반복되는 운명의 고리를 끊어내는 이야기. 세 편 다 같은 것을 들려주는 건 아닌데, 유독 그 '말' 혹은 '문장'에 내가 사로잡혔다는 걸 안다. 모두 같은 메시지를 전하는 부분이 있었다.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무시하지 말라고, 그렇게 자기 자신을 믿으라고.
"뭐야", 이게 내 반응이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말일지 고민했지만, 결국 "아니, 우연이다"라며 무시했다. 그러면서 이번엔 미국 드라마를 재생했다. 주인공이 자신이 착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선과 악의 의미를 배우며 발전하는 이야기. 사라진 비행기가 5년 만에 나타나 승객들이 혼란을 겪는 이야기. 뉴욕시 성범죄 전담 형사들의 이야기.그리고 그곳에서도 결국 같은 문장을 만났다.
"And never stop trusting that voice inside yourself." (내면의 목소리를 믿고요)
"It doesn't lie."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
일시 정지를 눌렀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피하고 있는 거였다. 어쩌면 무엇인지도, 피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을 테지만 그조차도 모른 채 눈을 감고 귀를 닫은 걸지도 모르겠다. 내가 피하려고 하는 건, 나를 조종한다. 바로 갈 수 있는 길을 굳이 굳이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상처 입는다. 작은 것부터, 그리고 점점 더 깊은 것들까지.
꿈속의 나처럼, 깨지는 유리를 입에 물고도 뱉어내지 못하는 것처럼.
어떤 말을 할지 말지 고민하던 중이었다.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일에 앞장서는 게 되어버릴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조심스럽게 꺼낸 말에 대해 신중하지 못했나, 돌아보던 중이었다.
'의무'와 '도리'에 대해 생각하던 중이었다. 혹은 적어도 '예의'에 대해.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정말 필요한 것인가, 묻기 시작했다. 내 진정한 마음을 외면하면서까지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가. 남을 배려한다는 명목 아래 나 자신을 계속 상처 입혀야 하는가.
어떤 의미가 남았는가. 회의감으로 스멀스멀 물드는 중이었다. 동시에 무언가 깨어나고 있었다. 꿈에서처럼, 입 안 가득한 유리 조각을 토해내려는 움직임. 그것이 얼마나 아플지 알면서도, 아니 정확히 그렇기 때문에 더욱, 뱉어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내면의 목소리는 배신하지 않는다.
그것은 투명한 유리컵 같다.
비어 있을 때조차 빛을 품을 줄 알고, 깨져도 진실을 드러낸다.
나는 이제 그걸 두려워하지 않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