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우리 부부는 기쁘지 않았다. 신랑은 실직상태였고 통장에 돈은 없었다. 나는 회사를 그만둔 상태였고 준비하던 일은 임신 때문에 지속하기 어려웠다. 신랑은 극도로 예민했고 나는 지쳐있었다.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안정기라는 임신 5개월 차에 원인불명의 유산을 했다. 신랑은 돈을 벌어야 한다며 태국 지사로 나갔다. 수입은 불안정했다. 나는 하는 수없이 잡코리아에 재취업을 했다. 우리는 각자 자리를 잡기로 했고 열심히 일했다.
2008년 헤드헌터를 그만두고 (잡코리아에서 꽤 성과가 좋았던 나는 당시 퇴직금으로 2천만원을 받았다.) 지금의 일을 준비하기로 결심했다. 배워야 할 것과 해야 될 일들이 너무 많았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메이크컵을 배우기 위해 학원에 들어갔고 동시에 피부미용 학원을 다녔다. 말뿐이 아닌 즉각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컨설팅을 하고 싶었기에 필요하다고 생각한 기술이었다. (나는 얼굴이 바뀌지 않으면 이미지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학원을 하루에 두 군데 이상 다니는 것은 정말 힘이 들었다. 8개월 동안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는 압구정에 있는 메이크업 학원에서 실기수업을 했고, 오후 2시부터는 강남역에 있는 피부학원에서 저녁 6시까지 수업을 들었다. 압구정에서 강남역까지 멀지는 않지만 늘 차가 막히는 곳이라 점심을 먹을 시간은 없었다. 늘 짐은 많았고 시간은 없었기에 나의 점심은 운전하면서 먹는 편의점 김밥과 샌드위치였다.
학원을 다니는 동안 지인들로부터 받았던 단골 질문은 “학원에서 배우는 과정을 마치면 뭐할 거니? 메이크업샵에 다닐 거야? 아님 피부관리샵을 할 거야?”였다.
당시 지금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면 다들 고개를 갸우뚱하거나 코웃음을 쳤다. 일반인이 누가 그런 컨설팅을 받겠냐는 거였다.
헤드헌터 경력 4년 차로 얻은 건 커리어를 설계하는 능력이었다. 내가 어떤 전문성을 갖추면 사람들이 나에게 컨설팅을 받을까를 생각했다. 공부와 경력이 필요했다.
첫 경력으로 메이크업 학원 원장님이 출강하는 대학에 실기 조교를 맡았다. (원장님 가방을 들어드리며 운전기사까지 도맡았다.) 33살에 메이크업 전공 석사 진학을 결정했다. 전공 관련 경력을 갖기 위해 잡코리아 사이트를 샅샅이 뒤졌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영어가 가능한 메이컵과 피부 관련 전문 지식이 있는 사람을 찾는다는 구직 광고였다. 그건 나를 위한 일이었다. 일주일에 3일 근무를 하는 조건이었다. 내가 맡은 일은 국내에서는 제품을 테스팅 & 리뷰하고 해외 출장을 다니며 자사 상품(스킨케어 제품과 색조화장품)으로 시연하며 상품을 홍보하는 일이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중국, 싱가포르, 대만으로 출장을 다니며 한국 메이컵 아티스트라는 타이틀로 백화점 행사도 다녀왔다. 촬영과 공연 메이크업도 종종 지원을 나가면서 이후에는 메이크업 학원에서 강의를 했다. 인근 문화센터에서 메이크업 레슨을 하면서 블로그에 레슨 공지를 올렸고 집에서도 개인 레슨을 했다. 레슨은 꾸준히 이어졌다.
석사 졸업 후 박사에 진학하면서 곧바로 대학에서 전공 외래교수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꽤 운이 좋았다.) 다행히 교수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얻었고 강의하는 대학이 늘어났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한때는 3개 대학에 동시에 출강하기도 했다. 내가 맡은 과목은 패션 이미지메이킹, 컬러 이미지메이킹, 뷰티이미지메이킹, 트렌드 메이크업이었다. 3개 대학에서 주 17시간 강의를 했다. 나는 매일 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당시 신랑은 한 달에 2/3를 태국에서 보냈다. 인공수정을 몇 차례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결혼은 했는데 나는 늘 혼자인 듯했다. 친한 친구 몇몇과 올케의 둘째 소식이 들려왔다. 주말에 밖을 나가기가 무서웠다. 유모차를 끌고 주말 나들이를 나온 가족들만 눈에 들어왔다. 이혼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깊은 우울감에 빠졌다.
건강에도 적신호가 왔다.
매일 피곤했고, 감기를 달고 살았다. 주기적으로 검사를 받고 있었기에 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문제가 생겼다. 간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져있었다. 의사 선생님은 이러다 간경화가 올 수도 있으니 쉬라고 했다.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는 진단과 함께. 진단을 받은 날 집에 돌아와서 한참을 울었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아무것도 못하면 어떡하지?’ 무서웠다. 억울하고 화가 났다. ‘왜 나는 남들처럼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안된다는 거지?’
출강을 나가던 대학에는 한동안 강의를 쉬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갑자기 많은 시간이 주어졌다. 여유가 생기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은 교회에서 운영하는 공부방에 과외 봉사였다. (대학 때 고3 수학 과외를 3년 정도 했었다.) 한없이 무기력하고 우울하던 때에 과외봉사를 하면서 생각보다 내가 많은 것을 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다행히 간수치는 정상으로 돌아왔다.
내가 하려던 일이 생각났다. 나는 교수가 되려던 게 아니었다. ‘작게라도 나의 일을 시작하자!’
2012년 겨울이었다. 그 길로 사업자를 등록하고, 2달 뒤 사무실을 얻었다.
그렇게 나는 작지만 내 사업을 시작했다.
<감성 이미지 클리닉 소울뷰티디자인>
To be continued..
- 이 고백은 저의 성장기입니다. 힘들었던 시간을 이야기하는 것이 망설여졌지만 저의 지난 이야기에 위로를 받았다고 말해준 분들이 떠올랐습니다. 아직 대단한 성공을 한 것도 유명인도 아니지만 누구에게나 힘든 순간이 있었음을, 넘어짐과 성장이 동시에 찾아올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빛이 보이지 않더라도, 혹 힘든 시간이라도 아픔을 담담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꼭 올 거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