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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뷰티펄 Jan 31. 2019

너는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1월 31일


새벽부터 몰아친 일에 진이 빠져 시계를 봤다. 고작 오전 10시였다. 남들보다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탓에 더 일찍 지치기도 한다. 새벽에 밥을 먹었는데도 머리를 쥐어짜다 보니 금세 에너지가 고갈됐는지 출출했다. 마침 아빠가 집 밑 떡집에서 갓 뽑은 따끈따끈 가래떡을 들고 들어오셨다.     


“딸, 이거 먹으면서 해라. 흰 가래떡 하고 쑥 가래떡 반반이니까 많이 먹어.

버스 기사 아저씨가 너 갖다 주라고 사주셨어.”    


“아니, 이걸 누가 다 먹으라고 가래떡을 한 보따리를 사주셨대요?”    


“딸이 다 먹어야지. 우리 집에 떡순이가 너밖에 더 있어?”   

 

“저는 떡순이지 돼지가 아니거든요. 엄청나게 보내셨네요.”    


“우리 딸 양이 줄었나? 아니야. 너는 다 먹을 수 있어.”    


오랫동안 한 동네에 사는 버스 기사 아저씨는 무언가 사다가 아빠를 만나면 우리 것도 함께 사서 보내주신다. 아빠도 동네 빵집에서 빵을 사다 동네 분들을 만나면 몇 개 더 사서 집에 갖고 들어가라고 사주신다. 우리 동네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덕분에 집에 간식이 끊이질 않는다.    


어쨌든 떡을 정리하기 전에 가래떡은 따뜻할 때 먹어야 했다. 제주에서 사 온 꿀에 찍어 먹으며 가래떡에 온 정신을 쏟고 있을 때 메시지 알림 소리가 들렸다. 평소에 툴툴거리기로 유명한 투덜이 친구가 무슨 일인지 아주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속으로는 ‘왜 이러는 거야’ 생각하면서도 투덜대는 것보단 낫다 싶어 놔뒀더니 역시나 부탁할 게 있다는 말이 이어졌다.     


회사 대표가 네덜란드 쪽 회사와 계약을 체결하는데 영문 계약서를 받고 좀 어려워하고 있다고 번역을 해달라고 했다. 회사 일이면 번역 전문회사에 맡기면 되는 일이고, 대표가 해야 할 일을 굳이 친구가 왜 개인적으로 부탁하고 다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개인적인 일도 아니고 회사 일을, 그것도 영문계약서 8장을 그냥 번역해주긴 힘들다고 거절했다. 갑자기 이어진 친구의 다급한 고백에 기가 막혔다.    


“야, 나 대표님 좋아한단 말이야. 우리 요즘 썸 타는 중인데, 이거 도와주면 바로 사귀게 될 것 같아.

그러니까 해줘.”    


“회사 대표면 회사 일은 알아서 하겠지. 네가 그걸 도와주려고 이러고 다닐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

난 못해.”    


“뭘 못 해. 너 번역 계속했으면서.”


“이건 못해.”    


“네가 못 하는 게 어디 있어. 너는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 빨리 해줘.”    


아빠는 그 많은 가래떡을 내가 다 먹을 수 있을 거라고 하셨고, 친구는 내가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아무리 떡을 좋아해도 가래떡 20줄을 하루 만에 다 먹지는 못한다. 번역 일을 했다고 해도 모르는 대표의 회사 계약서를 번역하고 싶지는 않다. 한 번에 과하게 많은 떡을 먹고, 어마어마한 금액이 걸린 다른 회사의 프로젝트 일에 선뜻 끼어드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내가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는지 몰라도 친구는 나의 다른 부분을 보지 못했다. 나는 위험한 일은 하지 않는다. 태생이 소심한 인간이라 그럴 용기도 없다.  

   

투덜이 친구는 저녁으로 혼자 만두를 먹는다는 걸 보니 대표와 썸에 문제가 생겼나 보다. 다시 투덜대기 시작했다. 그래. 역시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소심한 나나 투덜대는 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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