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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리는 작가 Jun 17. 2023

'다른' 길에서, '각각' 행복하기..

꾸준히 달리는 사람으로 살아온 지 4년......


왜 그렇게 맨날 달리느냐고 물어오는 사람이 종종 있다.

사람들은 이제 내가 달리는 사람으로 재탄생했다는 걸 받아들이면서도, 도대체 왜?라는 의구심의 흔적은 여전히 떨치지 못했다. 지루한 활동이지 않느냐며 무슨 생각을 하며 뛰는지까지 물었다. 다시 내게 질문을 돌린다. 나는 왜 뛰는가?


처음에는 '한풀이'처럼 달렸다. 떠밀리듯 한 결혼생활은 내 생각과는 다르게 전개되었다. 떠밀렸다고 해서 정략결혼이나 집안의 사연이 있었던 건 아니고, 그냥 결혼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 당시 나는 아주 미숙한 사고를 했었는데, K장녀로 부모님의 착한 딸로 사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결혼도 부모님의 결정이 컸다. 두 분이 내게 결혼할 때가 되지 않았냐는 말에 27살에 사귀던 남자와 결혼했다. ('너와 결혼까지 하려했'던 건 아닌 우리 남편에게는 또 심심한 죄송을 남긴다. 하지만 내가 결혼을 안 했으면 안 했지 했으면 그대와 했을 게 분명하다.) 우리는 딸, 아들 하나씩 4인 평균의 모범적 가정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  


두 아이의 육아 과정에서 나는 굉장히 모범적인 엄마이고 싶었다. 두 아이 모유수유와 천기저귀 사용, 유기농 브랜드의 균형 잡힌 식습관까지 노력하는 엄마였고, 또 좋은 엄마 노릇을 해보기 위해 10년 다니던 회사를 덜컥 그만두기도 했다. 아이에게도 회사에도 집중하지 못하는 환경에서 나는 내 자식을 보다 잘 키우고 싶은 욕망이 더 컸다. 전업주부 10년은 내게 '선우엄마', '기현이 엄마'외 경력단절이라는 꼬리표를 남겨 주었다. 그리고  '착한 딸'에서 이제는 '좋은 엄마'를 열심히 하기 위해 나는 아이들 남은 음식과 불규칙한 식사, 육아스트레스를 풀던 맥주 한두 캔으로 임신 후 최대 몸무게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살이 많이 찌고도 스스로 몸 사이즈가 얼마인지 가늠이 되질 않아 벽에 잘 부딪치기 일쑤였고(갑자기 살이 찌는 사람은 자기 몸이 얼마나 큰지 잘 인지하지 못한다.) 극한 다이어트와 요요를 넘나드며 '살을 빼야지'하고 생각만 하고 있었다. 하마, D자형 몸매가 남편이 나를 부르는 애칭이었다. 나도 내가 승모근 부자에, 출렁이는 살덩어리로 내 몸을 받아들이며 살 줄 알았다. 생활운동인이 되기 전까지는.......


아침 공복 유산소를 시작하며 조금씩 빠지기 살이 빠지기 시작했다. 팔과 얼굴은 건강하게 그을렸고 혈액순환이 원활하니 혈색 또한 좋아 보였다. 단단해지는 다리근육을 볼 때 자긍심이 생겼고, 걷다가 뛰는 사람, 거기에 근력웨이트 운동을 하는 사람이 되다 보니 내가 제법 근사한 사람이 되어감을 느꼈다. 운동은 가족관계에서는 맞보지 못하는 승리감, 성취감을 느끼게 했다. 당시 내가 자주 했던 말이 "세상사 다 내 맘대로 안되어도 운동해서 몸 만드는 건 내 맘먹기에 달렸다."였다.


규칙적인 시간에 맞춰하는 운동은 계획하고 그걸 이뤘을 때 성취감을 느끼는 대문자 J형인 내게는 베프처럼 맞는 활동이다. 아침 달리기 동안 나는 완전히 혼자로 고립된다. 블루투스 이어폰 하나면, 음악에 쌓여 내 호흡만 느끼는 시공을 경험한다. 웨이트도 PT계획이 있지 않고서는 완전히 혼자서 누리고 온다. 즉 운동은 가족을 위해 가정주부를 하겠다 나섰던 내가 밖에 나가 혼자 누릴 수 있는 자유에 버금간다. 나는 혼자여야 충만해지는 사람이었다. 가족의 떠들썩함, 분주함, 챙기고 챙김을 받고 에서 자유로울 공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다행히 우리 가족은 운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달리기는 땀이 나고 얼굴이 그을린다며 질색이다.


결국 나는 운동을 나를 위해, 혹은 우리 가족을 위해 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달리기는 내가 내 정체성을 찾아가는 길에 가장 유력한 도구이다. 나는 내가 뛴 거리와 시간만큼 혼자를 누렸고, 자유를 느끼고 돌아와 가족에게 건강한 엄마와 아내로서 자리할 수 있었다. 우리는 '다른' 길에서 '각각'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셈이다. 그게 누군가에게는 게임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예술활동이나 어쩌면 누군가를 위한 가사활동일 수도 있다.


나는 나를 겪기 위해 달린다. 달리는 길에서 드는 생각의 파편이 나를 만들고,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나를 진정시키고, 또 나를 찾아 나서기 위해 길 위에 선다.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이 보다 더  행복하기 위해 나를 충분히 겪는다. 팔에 스마트워치의 자국이 허옇게 도드라진다. 내게 있어 그 허연 부분은 나를 구속하는 우리 가족이고 나머지 그을린 자국은 바로 내가 만든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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