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웠다는 그 한마디
아이를 키운다는 건 내 인생의 스승을 만나는 일이었다.
처음엔 내가 아이를 가르친다고 믿었다.
사랑하는 법, 세상을 살아가는 법,
그리고 옳고 그름의 기준까지.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알게 되었다.
그 모든 시간은 결국,
내가 배우는 여정이었다는 것을.
아마도 나에게 딸은
넘지 못할 산이자, 평생 품고 가야 할 숙제다.
그 아이가 없었다면
나는 세상을 오직 나만의 잣대로만
바라보며 살았을 것이다.
딸은 내게 세상이 하나의 시선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세상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그리고 그 속엔 차별과 무관심도 공존한다는 걸
가르쳐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는 원래 꽤 보수적인 사람이었다.
결혼 전에도, 결혼 후에도
민소매 한 번 입어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고등학교 시절,
딸과 가장 많이 부딪힌 건
공부도, 음악 연습도 아닌-
'옷'과 '화장'이었다.
“학생이 어떻게 그런 걸 입어?”
“고등학생이 화장은 무슨 화장이야. 꿈도 꾸지 마.”
그러면 딸은 늘, 단호하게 맞받았다.
“학교 가면 다 하는데? 왜 나만 안 돼?”
우리는 호랑이와 사자처럼 포효하며 부딪혔다.
때로는 말로, 때로는 차가운 침묵으로.
그 시간들은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며칠 전, 아들 짐을 정리하다가
한쪽 구석에서 본 적 없는,
노출이 많은 옷들을 발견했다.
순간, 오래전 딸과의 싸움이
그대로 되살아 났다.
'설마... 지금도 이런 거 입는 건 아니겠지?'
걱정과 불안이 동시에 올라왔다.
거기서 멈췄어야 했는데,
나는 어느새 전화기를 들고 있었다.
"엄마, 그거 버려. 예전에 받은 거야.
"입을 것도 아닌데 왜 받았어? 지금도 입어?"
"아냐. 지금은 안 입어. 걱정하지 마.'
"근데 왜 아직 집에 있냐고?'
"잊어버려서 못 버린 거라고 했잖아."
"그럼, 네가 버려. 왜 엄마한테 버리라 그래!"
창과 방패처럼 말들이 부딪히며
서로의 마음을 찔렀다.
감정은 피를 흘리듯 번져갔다.
그렇게 우리는 또다시 뾰족해졌다.
서로에게 창이 되고, 또 방패가 되어 찌르고 막으며
끝없이 맞섰다.
"걱정 안 하게 생겼냐고?"
말들이 오가며 감정이 격해지던 그 순간,
딸이 울먹이며 내뱉었다.
"그때는.... 내가 외로웠어.
그렇게 안 하면 학교를 갈 수가 없었어."
그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서로 치고받던 그 시간들이
사실은 외로움을 감추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기 때문이었다.
딸은 잠시 숨을 고르고 나직이 말했다.
"근데 지금은 달라.
이제는 내 안에도, 내 밖에도 진짜 자신감이 있어
연주하는 것도 행복하고,
가짜가 아니라 진짜 내가 있어서 그런 게 필요 없어.
필요하면 엄마한테 말할게
정말 미안해."
그 말 한마디에, 긴 시간 얼어있던 내 마음이
천천히 녹아내렸다.
딸도 울고, 나도 울었다.
"엄마도 미안해..."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날 밤, 나는 딸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외로웠다'는 말은
계속 메아리처럼 머릿속을 울렸다.
며칠 뒤, 나는 아들에게 물었다.
“너도 학교 다닐 때 힘든 일 있었어?”
아들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중학교 때 가끔 애들이 내 눈이 왜 그러냐고 놀릴 때 있었어.
그때는 좀 당황했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스트레스도 받았지."
"그런 일이 있었는데 왜 엄마한테 얘기 안 했어?"
"엄마가 걱정할까 봐.
어차피 내 문제잖아. 내가 해결해야 하니까.
그리고.... 참을만했으니까."
"그래도 어쨌든 힘들었다는 거잖아."
"힘들었지. 근데 뭐.... 지금은 배웠으니까 괜찮아."
그러더니 아들은 되물었다.
근데, 왜 물어봐. 무슨 일 있어?"
"아니, 누나가 외로웠다고 해서 엄마 놀랐어.
누나는 친구들도 많으니까 외로울 거라고 상상도 못 했거든."
"외롭지... 친구가 있어도 누나는 누나 나름대로 힘들었을 거야.
어쨌든 다르니까. 여러모로 우리랑도 다르고,
그래서 아마 나보다 더 힘들었을 거야.”
"야.... 근데 너희 둘은 왜 엄마한테 말 안 했어?"
"엄마가 걱정하는 게 싫으니까 그랬겠지.
걱정 마, 지금은 우리가 다 핸들 할 수 있어.
그리고 이제는 안 외로워."
그제야 알았다.
나는 아이들을 너무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보지 못한 순간이 많았다는 것을.
친구가 많아 보였던 딸도 외로웠고,
늘 웃던 아들도 상처를 받았었다.
나는 아이들의 외로움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떻게 엄마인 내가 이렇게 모를 수 있구나 싶어
속상함과 자책으로 무너지고 있을 때,
아들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 누구나 다 외로워.
엄마도, 아빠도, 누나도.
그건 각자가 해결해야 하는 거야.
그리고 누나도 괜찮다고 했잖아.
그럼 진짜 괜찮은 거야.
그리고 엄마, 나 알잖아. 나도 괜찮아.
엄마는 엄마만 신경 써."
삼천마디보다 단순한 그 한 마디.
그 말이 그렇게 위로가 될 줄은 몰랐다
나에겐 든든하게 내 편이 되어주는 가족과 남편이 있음에도
어쩔 수 없이 외로움이 밀려와
가끔은 서럽게 눈물이 날 때가 있었다.
그런데 왜 아이들 역시 외로울 거라고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을까.
하지만 이제 안다.
그 속에 숨어 있던 외로움,
그 외로움을 견디며 아이들은 강인해지고,
그리고 그 시간들을 버티는 용기를 키워왔다는 것을.
오늘도 나는 아이들에게서 배운다.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고,
듣지 못했던 이야기를 듣는 법을.
그리고 그 속에서,
조금씩 더 나은 엄마가 되어간다.
아니,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