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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 너는 내 아빠였나 보다.

사랑은 돌고 돌아 다시 돌아온다.

by 감차즈맘 서이윤

나는 지금까지 아들과 부딪혀서 마음에 멍이 든 기억이 거의 없다.

딸과는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예민함이 칼날처럼 곤두서곤 했는데,

아들과는 달랐다.


부딪힌 일이 있어도 일상으로 돌아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쉽게 잊어버리곤 했다..

툭툭 털면 그뿐이었고, 유쾌했고, 아무렇지도 않았다.


돌아보면 그런 관계가 가능했던 건

아들의 엄마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신뢰가

보이지 않는 바닥처럼 늘 깔려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들은 늘 엄마인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하물며 중요한 인터뷰 때도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을 때면

종종 엄마인 나를 언급하곤 했다.


"뭐 하러 엄마 얘길 해." 하면서

그 앞에선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내 입꼬리는 올라가고 어깨에는 힘이 들어갔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부딪히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한 번씩 부딪히거나 말다툼을 하면

기본 세 시간, 네 시간은 걸렸다.


저는 그게 몇 시간이 걸리든

아들의 말을 끝까지 다 들어준 뒤,

"이제 내 차례다."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면 남편과 딸은

"귀가 따갑다"며 자리를 피했고,

결국엔 "아직도 안 끝났어?, 오 마이 갓!" 하며

지쳐 뻗어버리기 일쑤였다.


남편은 중간에서

아들에게 "그냥 미안하다고 해" 라며 달래려 했고,

저에게는 "이제 그만 좀 해"라고

중재하려 했다.


그럴 때마다 아들과 나는

동시에 남편을 째려보았다.


옆에서 보는 사람이 지쳐 나가떨어져도

우리 둘은 괜찮았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배가 고프면 "밥 먹고 다시 하자" 했고,

피곤하면 "서로 쉬었다 밤에 다시 만나자"

우리는 그렇게 싸움의 휴전선을 그었다.


서로 맞다고 논쟁을 벌이다가도,

두세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렜냐는 듯

다시 웃으며 일상으로 돌아갔다.


아들과의 싸움에는 어려움도, 상처도 없었다.

싸움 속에서도 평온했다.


나는 하루에 오백 마디쯤 하다가

천 마디가 나올라 치면,

아들은 제일 먼저 눈치채고 말했다.


"엄마, 우린 좀 있다 다시 만나요." 하거나

혹은 짧게, "미안해." 하며 바로 꼬랑지를 내려줬다.


아들은 집에서 유일하게

그 선의 모호한 경계선을 참 잘 지켜주는 아이였다.


마음속에 불편함이 올라오면

아들은 그 기운을 너무나 빨리 알아채고

신기하게도 바로 멈췄다.


또 때로는 나의 예민함이 불쑥 튀어 올라

뾰족하게 "예의 지켜, 친구 아니야."

라고 한마디만 해도, 아들은 바로 꼬리를 내렸다.


"앗, 미안, 안 할게. 조심할게."


그런 아들이었기에

우리는 다투면서도 금세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돌아보면, 내가 집에서 유일하게

무장 해제된 사람은 바로 아들이었다.


아들하고의 부딪힘은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다.

딸과 남편은 기억한다는데,

정작 우리 둘은 늘 잊어버린다.


어린 시절, 아빠가 있는 집에서

무거운 갑옷을 벗을 수 있었던 것처럼,

아들은 나에게 망설임 없는

무한한 신뢰와 사랑울 주었다.


고등학교 졸업 전날,

아들이 상을 받는다는 걸 알았지만

여러 곳에서 장학금까지 받는다는 건 몰랐다.

행사장에서 알게 된 나는 깜짝 놀랐다.


"왜 말 안 했어?"

"엄마 놀래주려고 했지!" 엄마 좋아?


삼천마디를 쏟아내는 아들을 보며

나는 웃음이 났다. 너무 행복했다.


집에 돌아오자 아들은 상장과 장학금을 내밀며 말했다.

"엄마 써. 사고 싶은 거 사!"


환하게 웃으며 선물하듯 건넸다.


졸업식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이 LA타임스에서 인턴을 시작했고,

첫 월급이 들어온 날, 아들은 말했다.


"엄마, 계좌 엄마 이름으로 해놨어. 그냥 써.

엄마 쓰라고 한 거니까, 진짜 그냥 써!

난 대학 가서 또 벌면 돼."


대학도 장학금으로 다니는 아들이

끊임없이 나에게 주려는 마음에

대견함, 고마움, 미안함이 뒤섞여 목이 메었다.


아들은 종종 물었다.

"썼어? 왜 안 써? 쓰라고 했잖아!"


내가 그냥 모아두고 있다고 말하면,

아들은 답답한 듯 말했다.

"엄마, 자신한테 좀 쓰라고!"


그렇게 묵묵히 모든 걸 내어주는 아들을 보며,

문득 아빠가 생각났다.


회사에서 받은 보름달 하나, 초코파이 하나,

입에도 대지 않고 내게 건네던 아빠.

아빠의 허기진 배와 맞바꾼 사랑,


그 사랑과 아들의 마음이 겹쳐지며

눈시울이 나도 모르게 뜨거워졌다.


아흔이 넘은 아빠의 얼굴이 떠오르는 순간,

눈물이 고였다


이제 나는 안다

아빠의 사랑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들의 마음속에서

다시 나를 향해 되돌아오고 있었다.


오늘도 나는 조용히 생각한다.

"사랑은 돌고 돌아 다시 돌아온다.

정말 전생에, 너는 내 아빠였던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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