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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그 정도로 부자였어?

by 잰걸음

Wife asks...

남편의 첫 인상은 편안하고 수수한 편이었다.

그래서 어렸을 때 잘 살았다라고 얘기하면, 큰 욕심이 없는 사람인가보다~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함께 살면서 가끔 툭툭 던지는 어릴 적 에피소드에 화들짝 놀랠 때도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남편을 만났을 때는 경제적으로 가장 바닥을 쳤을 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궁금했다.

왕자와 거지... 그 극과 극의 삶이 어땠는지.


"어릴 때 '우리 집이 잘 사는구나..'라고 느꼈던 적이 언제야?"



Husband says...

올림픽을 앞두고 들썩이던 80년대.

경기가 오르락내리락했지만 대체적으로 활기찼던 그때,

나는 다 우리 집 정도로 사는 줄 알았어.


그 시절, 신사동에 있던 ‘재능개발원’이라는 유치원에 다녔어. 지금으로 치면 국제학교 유치원 정도 되는 곳이었고, 거기서 나는 다섯 살에 바이올린을 처음 배웠지. 당시 사람들은 바이올린을 잘 몰라서 ‘깽깽이’라고 불렀어. 내가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고 다니면 어른들이 "그게 뭐니?" 하고 물었고, 내가 “바이올린이요”라고 대답하면 “아, 깽깽이”라고 했어. 그 시절엔 그랬지.


재능개발원은 보통 유치원이 아니야. 원장이 일본 스즈키 선생님의 직속 제자였고, 우리는 5살부터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플루트 같은 악기를 체계적으로 배우는 곳이지. 유치원생들이 모여 오케스트라를 구성했고, 매년 한 번씩 연주회를 열었어. 한 번은 세종문화회관에서 연주하기도 했다니깐. 지금 생각해도 믿기지 않아.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서는 일은 어른들에게도 흔한 일이 아닌데, 우리는 그 나이에 무대에 섰다니. 그만큼 부모님들의 뒷받침이 컸고, 나는 그 당시 그것이 특별한 일이라는 걸 모르고 그저 당연하게 여겼어.


두 번째로 우리 집이 잘 산다고 느낀 순간은, ‘코오롱 스포렉스’에서였지. 서초동에 있던 이 스포츠센터는 아마도 국내 최초의 평생 회원제 스포츠클럽이었을 것이야. 그곳은 흔한 곳이 아님. 나중에 알고 보니 국가대표 여자농구 감독이 그곳에서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정도로, 엘리트 체육인들의 훈련장이기도 했어. 우리 가족은 그곳의 평생 회원이었고, 난 초등학교 4학년 생일날 그 체조장을 통째로 대관해서 생일 파티를 했잖아. 코치들이 직접 프로그램을 짜고, 친구들과 함께 체육 놀이를 하며 하루를 보냈어. 다른 친구들은 생일날 짜장면 시켜 먹고 케이크 불던 시절에, 나는 스포츠클럽을 빌려 생일잔치를 한 거야.


그리고 세 번째 기억. 1989년,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고, 누나와 단둘이 미국 여행을 갔어. 지금이야 미성년자 혼자 비행기 타는 일이 별일이 아니지만, 당시엔 민간인의 해외여행 자체가 갓 자유화되던 시기였지. 보호자 없이, 우리 둘만, 그것도 영어도 못 하면서 비행기를 타고 미국 JFK 공항에 내렸어. 엄마는 “사람들 많이 가는 데로 따라가라”고만 했고, 우리는 그 말대로 시민권자들이 향하는 출구로 따라갔다가 잠깐 헤매기도 했어. 다행히 작은 할아버지를 만나 무사히 도착했지만, 그 경험 자체가 내게는 충격이자 자랑이었어.


그때는 몰랐지. 우리 집이 그렇게 특별한 줄.


그런데 지나고 보니, 내가 다닌 유치원, 생일을 보냈던 체육관, 누나와 함께 갔던 미국 여행 하나하나가 모두 그 시대 대부분 아이들이 누릴 수 없던 경험이었어. 그래서 난 그 시절을 생각하면 언제나 입가에 미소가 돌아. 단순히 돈이 많았기 때문이 아니야. 부모님이 우리에게 열어준 넓은 세상과, 그 속에서 내가 누렸던 자유와 기회에 감사하지.



청년이 된 후 갑자기 닥친 처참한 가난 속에서도

나를 버티게 한,

가슴 속 숨겨둔 작은 보물 상자와 같은 기억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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