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fe asks...
세종문화회관에서 10살에 바이올린 연주를 하고,
평생 회원제 스포츠클럽을 대관해서 생일파티를 했다는 남편.
그 외에도 또 놀랬던 에피소드는
가족 생일에 고급 호텔 주방장이 직접 집으로 와서 대형 참치 해체쇼를 했다는!
왕자 같은 삶을 살았던 남편에게
과연 언제부터 거지의 그늘이 드리우기 시작했을까?
"그렇게 금수저 유년시절 보내고 언제부터 상황이 나빠지기 시작했어?"
Husband says...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내다가 첫 좌절을 느낀게 대학 입시 때야.
이제껏 엄마 아빠가 알아서 다 해줬지만 대학 시험만큼은 내가 혼자 해야하잖아.
엄청난 과외비가 무색하게 대학에 떨어져서 너무 괴로워하니까 아빠가 차라리 군대를 다녀오라고 하셨지.
군대 다녀와서 재수를 준비했는데 시험 트라우마가 생겼는지 도저히 안되겠더라고.
그래서 유학을 준비했지. 도피성 유학ㅎ
유학이 마지막 동아줄인줄 알고 당시 2번이나 거절 당했던 유학비자를 위해 30일 작정 기도까지 했어.
결국 극적으로 비자를 받게 되어 미국땅을 밟았지.
내가 간 곳은 위스콘신이라는 시골 동네여서 한국인은 물론이고 동양 사람 자체가 별로 없는 곳이었어.
완전 백인 동네라서 내가 지나가면 다들 쳐다보고 심지어 피부 만져봐도 되냐고 묻기도 했지.
그렇게 익숙하지 않은 타지에다가 영어도 거의 못 했으니 상황이 전혀 좋아지지 않았어.
그러니까 학교에서도 조모임 같은 거 할 때 왕따되기 십상이었지.
설상가상으로 내가 유학 준비를 할 때쯤부터 이미 가세가 기울어지기 시작했던 것 같아.
엄마 아빠가 부동산 문제로 엄청난 빚을 지게 된거지.
미국 간지 2년간은 괜찮았는데 그 후부터는 용돈이 끊기기 시작했어.
엄마 아빠가 전화로 자초지종 얘기를 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전부 다 얘기한 것도 아니라 한 20% 정도만 걸러서 얘기하신 것 같아.
지원이 끊기니 생활이 어려워지고 나도 돈을 벌러 나갈 수 밖에 없었어.
그래서 식당 알바부터 시작했어.
생전 해본 적 없는 주방 잡일들을 하니 처음엔 온몸이 쑤시고 몸에서 음식 냄새 나는게 너무 싫었지.
그런데 뭐 돈이 없고 난 취업비자가 없는데 별 수 있겠어.
그냥 사장님 비위 맞추고 같이 일하는 멕시칸 동료들과 농담 따먹으면서 버텨냈지.
(내가 고기를 기가 막히게 잘 굽는 것도, 설겆이할 그릇은 항상 물에 담그는 버릇도 그때 때문이지ㅋㅋ)
그럼에도 생활은 넉넉하지 않아서
미친 위스콘신 추위를 난방 없이도 버티고
끼니 거르는건 다반사였지.
그렇게 미국에서 8년을 보내면서
완전히 담금질을 당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지.
아마 지금의 쪼잔해보이는 습관들이나 사람을 일단 의심하고 보는 것들이 다 그때의 영향이었을거야.
Wife thinks...
연애 초기 때도 남편은 영화관에서 데이트하는데 팝콘을 영화관에서 사지 않고 근처 편의점에서 사오곤 했다.
그랬기에 어렸을 때 부자였다라는 얘기를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지금 남편의 8할은 미국 유학 시절에 만들어진 것 같다.
그 시간 속에서 그동안의 사치와 교만이 탈탈 털린 듯.
지금 생각해보면,
만약 그 시간이 없었더라면
평범한 집안의 나와 남편은 만날 일 조차 없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