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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송 Jan 06. 2025

찾아 헤매다가 찾은 것

박완서의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p.111 '나는 누구일까' 이어 쓰기

일전에 용산 쪽에 사는 이가 나를 초대했는데, 그쪽 지리에 어두운 나를 위해 남영역까지 차를 가지고 마중을 나와주겠다고 했다. 시간이 안 맞는 경우 몇 번이라도 역 주변을 돌겠노라고 하면서 차 번호랑 핸드폰 번호까지 일러주었다. 나는 남영역이라는 데는 처음 가보는 데라 어디서 어떻게 갈아타야 되나 전철 노선표를 펴 놓고 꼼꼼하게 예습을 하고 나서 떠났다. 요즘처럼 주차 사정이 나쁜 때는 그저 차 얻어 타는 쪽에서 먼저 가 있는 게 수라는 걸 알기 때문에 약속 시간보다 15분가량 먼저 남영역에 도착했다. 나는 만 원짜리 회수권을 쓰는데 그게 그때 마침 다 되어 표는 되돌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게 그렇게 큰일이 될 줄은 그때는 미처 몰랐었다. 


약속 시간이 지났는데도 마중 나오기로 한 차는 나타나지 않았다. 한 군데 서 있는 것도 거치적댈 정도로 역 주면의 인도는 좁고도 매우 복잡했다. 20분, 30분이 지나도 차는 나타나지 않았다. 약속이 뭔가 잘못된 모양이었다. 아마 이럴 때 써먹으라고 핸드폰 번호를 알려줬지 싶어 번호를 적어 놓은 쪽지를 찾았다. 그 쪽지를 지갑 갈피에 찔러 넣은 생각은 나는데 핸드백 속에 지갑이 없었다. 나는 지갑을 빼놓고 핸드백만 들고 나오기를 잘하지만 소매치기를 당했을 가능성도 아주 배제할 수는 없어서 우선 집에 전화를 걸어봐야 할 것 같았다. 전화카드도 핸드백 속에 없길래 잔돈을 찾았다. 워낙 큰 백이고 안주머니와 겉주머니까지 있는지라 잔돈푼이 숨어 있을 데가 많았다. 그러나 아무리 손을 넣고 휘저어봐도 십 원짜리 한 품 만져지지 않았다. 시간은 약속 시간에서 거의 한 시간 가까이나 경과하고 있었다. 


나는 차를 기다리는 걸 단념하고 남영역사 안으로 들어가서 계단에 자리 잡고 앉아 본격적으로 핸드백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정리하지 않은 온갖 잡동사니들을 다 쏟아 놓고 바닥까지 훑어도 어쩌면 땡전 한 푼 안 나왔다. 복잡한 역사 안에서 내 꼴이 말이 아니었지만 내친김에 수첩까지 뒤지고 나서 쏟아 놓은 것들을 수습했다. 그때까지도 가까운 은행만 찾으면 현금카드로 돈을 찾을 수 있으려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카드도 지갑과 함께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더럭 겁이 났다. 나를 이 낯선 곳에 세워 놓고 마중을 나오지 않은 이에 대해서도 분노보다도 걱정이 앞섰다. 지갑도 궁금하고 궁금한 것 천지인데 달아볼 방법이 없었고, 첫째 돈 없이 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아무런 묘안도 떠오르지 않았다. 만 65세만 넘으면 노인증이나 주민등록증만 보이면 공짜로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나는 돈을 버는 노인이니까 돈 내고 표 사서 다니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이야말로 그 따위 잘난 척을 할 형편이 아니었다. 공짜 표를 청하러 창구로 가려다 말고 생각하니 노인증은 아예 발급도 안 받았고 주민등록증도 잃어버린 지갑 안에 있으니 이를 어쩔 것인가.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이 벼락 치듯 내 맹한 정신을 때렸다. 


여기서 우리 집이 도대체 몇 리나 되며, 방향은 어느 방향일까? 여기도 같은 서울 시내일까? 나는 갑자기 남영역 주변이 서울의 어떤 곳과도 닮지 않은 것 같아서, 내가 길을 잃은 게 서울이 아닌 어느 먼 낯선 도시처럼 여겨졌다.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여기가 어딘지 알기 위해서,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빨리 집안 식구 누구 하고라도 연락이 닿아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무슨 수로 전화를 걸 것인가. 


남영역 앞 인도에는 전화 부스가 열 개 가까이 늘어서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 현금으로 걸 수 있는 데를 지키고 서서 누군가가 돈을 남겨 놓은 채 수화기를 내려놓지 않고 나오는 데가 없나 잔뜩 눈독을 들이고 기다렸다. 그날따라 아무도 거스름돈을 남겨 놓지 않았다. 길에 나가면 가끔 나를 알아보고 인사를 하는 독자를 만나게 된다. 돈 남은 공중전화에 대한 기대감이 무너지자 남은 희망은 단 하나, 누가 나를 알아보는 거였다. 나는 다시 역사 안으로 들어가 승객들이 쏟아져 내려오는 계단 밑에 턱 쳐들고 서서 누가 나를 알아보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누군가가 박완서 씨 아니세요? 하고 말을 걸어온다면 그렇다고 하고 나서 500원만 달라고 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나한테 아는 척을 안 했다. 혼잡한 통로 한가운데 서 있는 나를 모두 귀찮다는 듯 밀치고 지나갈 뿐이었다. 거기서 어딘지 종잡을 수 없는 아득한 마음이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는 더 막막한 무서움증으로 변했다. 도대체 나는 누구란 말인가. 카드나 주민증 없는 나는 이렇게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 


그때 내가 남영역에서 잃은 건 지갑도, 길도 아니라, 명함만 한 주민증이나 카드에 불과한 나 자신이었다. 다행히 역전엔 빈 차가 많이 늘어서 있었다. 선금 없이 집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그러나 나는 선뜻 타지 못하고 기웃대며 카폰이 있는 차를 찾았다. 전화를 통해서라도 내 자식이건 친구건, 아무튼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내 매달리고 싶었다. 그러기 전엔 그냥 집으로 가봤댔자 집에 아무도 없을 수도, 혼자 문 따고 들어간 집에 돈도 지갑도 없을 수도 있었다. 그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이어 쓰기 시작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 현기증이 날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박완서 선생님." 어디선가 내가 누군지 선명하게 말해주는 사람. 나를 용산으로 초대한 이였다. 구세주처럼 나타난 그이가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뒤 따라오던 택시의 경적 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차에 올랐다. 인내심 없는 그 택시는 내가 차에 타고 출발을 해도 빵빵거리며 난리였지만 나는 그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저 나를 찾아 준 그이가 고마웠고 나 자신을 되찾은 그 순간이 벅찰 뿐이었다. 오다가 앞 차에서 사고가 나는 바람에 늦어진 그이는 낯선 곳에서 기다릴 내 생각에 마음을 졸이며 전화를 기다렸다 한다. 약속 시간이 훨씬 지났지만 혹시라도 아직 기다리고 있을까 와봤다는 것이다. 내가 지갑과 전화번호를 적은 쪽지를 두고 나왔다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그날 나는 남영역에서 내가 누군지 찾아 헤매었던 한 시간을 잊지 못한다. 그래도 끝까지 나를 찾아 주는 이가 있었고, 그 집에서 참으로 융숭한 식사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그이의 배려로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호사도 누릴 수 있었다. 그날의 곤혹스러운 경험으로 나는 핸드백마다 동전 몇 개와 지폐 몇 장을 꼭 넣어둔다. 언제 또 지갑을 두고 가방만 들고 나오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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