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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comingsoo Mar 15. 2022

2021. 5. 3. 월. 그리스의 대명절

우연의 신비

 그리스에서의 부활절은 추석이나 설날 같은 큰 명절 중에 하나다. 상점들은 대부분 문을 닫았다. 집집마다 예수 부활의 축포를 터뜨리느라 토요일 밤은 시끄러웠고, 가족이 모두 모여 양고기를 굽느라 일요일 점심은 연기로 자욱했다. 5월로 접어들어 기온은 점점 올라 가져왔던 옷들은 더 이상 입지 못한다. 안되겠다 싶어 버스를 타고 시내를 나갔다. 버스로 20여분 거리에 바닷가를 끼고 있는 시내가 있다. 얇은 책 하나를 챙긴 것은 잘 한 일이었다. 나무 그늘 옆 벤치에 앉아 몇 장 읽었는데 한동안 읽지 않아서 기억이 나지 않는, 연필 밑줄이 선명한 책장들을 다시 넘기며 그때는 무심코 넘어갔던 한 문장이 유독 걸렸다.

 “모든 존재자는 다른 존재자와 필연적으로 만나고 부딪치며 존재한다.” 최근 몇 달간 비교적 꾸준히 읽어나간 책들에서 하나같이 말하고 있는 단어가 ‘부딪힘’, ‘마주침’이다. 오늘도 나는 같다고 여겨지는 시공간 속에서 수없이 다른 마주침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겪었고 지금도 그러하다.

 주로 책을 읽고 내용을 요약하기 위해 저녁마다 펼치던 노트. 어디까지 정리했는지 목차를 살피다 우연히 날짜만 덩그러니 적힌 제목의 노트를 열었다. 그리고 계획에 없던 일기를 거의 4개월 만에 쓴다. 이 또한 반복적인 일상 속에 피어난 다른 마주침이다.


 그런 마주침, 어떤 계기라는 것은 예고 없이 일어난다. 오늘도 계획에도 없던 말을 내뱉었다. “난 우연의 신비를 믿는다”라고. 우연의 신비라는 말에는 아직 알지 못함, 예상치 못함, 낯설고, 그래서 거북스럽기까지 한 것들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리라. 무작정의 긍정이 아니라 현재의 제약을 인정하며 다른 움직임을 하려는 그런.


 하지만 습관이라는 추는 참으로 무거워서 한 발 내딛기도 버겁다. 어떤 마주침이나 번뜩임의 순간, 어떤 다른 생각들이 떠오를 때 그것을 몸으로 움직여 ‘해’ 보는 일까지의 거리는 참으로 한없다.


 제약된 현실을 인식하며 제한된 현실에 요만큼의 균열을 내는 움직임이란 얼마나 어려운지. 그래서 그것은 얼마나 위대한지.


 그런 위대함이 버거워서 피하는 건지, 습관의 추가 너무 무거워서 못 움직이는 건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그나마 이것을 씀으로써 오늘은 어제와는 다른 행동을 조금이나마 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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