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날 때, 머릿속으로는 멈춰야 한다는 시그널이 계속 울리지만 멈추기는커녕 더욱 폭발적으로 분노를 표출하고 마는 나를 마주할 때마다, 나는 분노조절장애가 있거나 감정을 억누를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 끓어오르는 화를 주체하지 못해 애먼 아이들에게 쏟아낼 때는 병신도 이런 상병신이 없다는 자괴감과 아이들에게 상처 줬다는 미안함, 내가 아이들에게 남긴 생채기가 회복되지 않아 지금의 나 같은 불완전하고 저질인 어른으로 성장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함과 두려움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나의 분노는 어쩐지 사그라들지 않았다. 마음속에 일렁거리고 있다가 누군가가 작은 불쏘시개 하나 툭 던지면 욕할 새 없이 분노는 폭발했다.
하지만 나는 어른이다.
성숙하게 대처해야지.
이성적으로 행동해야지.
그러려면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되지, 특히나 분노 같은 나쁜 감정은.
가슴이 답답하고 목구멍이 뜨거워져서 입을 떼면 불을 뿜을 태세였기에 입을 다물었다.
남 탓하면 그 사람이 대책 없이 원망스러워져서 '내 탓이오, 내 탓이오' 했더니 나 자신이 꼴 보기 싫어졌다.
혼자 화내고 상처 받고, 그런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상처 받을까 봐 최대한 이해해보려고, 나에게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쥐어짜서라도 만들어서 이 지랄 맞은 상황들을 납득해보려고 애썼지만, 종국에는 똑같은 상황에 나만 맨날 열 받고 나만 속상하고 나만 미친년 되는 것 같아서 짜증이 났다. 나를 분노케 하는 상황들은 점점 사소한 것들로 번져갔다. 그리고 사소한 상황마다 '내가 죽어야만 끝나는 상황인가? 내가 죽는 것이 이 고리를 끊는 답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찰을 하는 나를 발견할 때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할 때였고, 미술심리치료를 시작했다.
토요일에도 비슷한 감정의 패턴이었다.
새벽에 출근해서 새벽에 퇴근하는 탓에 얼굴을 본지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바쁜 남편이 정말 오랜만에 일찍(그래 봤자 저녁 10시 넘어) 퇴근했다. 자려고 누웠던 아이들도 모두 뛰어나가 한바탕 댄스파티가 벌어졌다. 흐뭇했다. 그래, 이 거지. 이걸 위해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이라도 남편 직장 따라다니며 이사하는 거지. 아이들이 잠들고 난 후, 아이들을 쓰다듬던 남편이 말했다. 막내 아토피가 다시 심해지고 있으니 한의원에 같이 가자고. 오전에 출근하지만 얼른 마치고 오겠다고. 피딱지를 보니 마음이 아프다고.
다음날 아침, 한의원에 가려면 마음이 급했다. 어제 밤늦게까지 아빠와 노느라 늦잠 잔 아이들을 아침밥 먹이고 씻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남편은 언제 오냐는 내 카톡을 읽지도 않고 있었다. 불안한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어제 남편이 먼저 한 약속인데 잊을 리 없겠지.' 했다. 한의원에서는 늦어도 1시까지는 접수를 해야 한다고 했는데, 남편은 11시가 넘어 전화를 해서는 대뜸 "무슨 일인데?"라고 했다. 짜증이 솟구쳤지만 의식적으로 눌렀다.
"오늘 한의원 가자고 했잖아. 1시까지 접수해야 한대. 늦어도 12시까지는 와야 해."
남편은 알겠다고 했고 나는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언제 오냐고 재촉하는 나의 카톡 옆의 숫자 '1'은 1시가 넘도록 지워지지 않았다.
짜증 나고 화가 났다. 회사에서는 맡은 일을 칼같이 해내는 사람이다. 남한테 싫은 소리 듣는 것 싫어하고 아쉬운 소리 하는 것도 싫어해서 정말 열심히, 또 잘 해낸다는 걸 잘 안다. (나와 같은 직장에서 근무했었다.) 그런 사람이 나와 가족과 하는 약속은 잘도 잊어버리고 시간 약속도 늦기 일쑤다. 이유는 항상 같다.
"시간이 그렇게 되었는지 몰랐어."
이번에도 남편은 그렇게 말했다. "시계를 보니 이미 약속시간이 지나 있더라고."라고.
나는 분노했다.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아 싫었고, 아이의 병원보다 일을 우선시하는 것 같아 원망스러웠다. 자기가 하지 않아도 내가 어떻게든 꾸려나갈 것이라고 믿는 것도 짜증스러웠다. 나한테 다 맡기고는 "잘하잖아. 믿으니까 그렇지."라는 말로 포장하는 것도 넌덜머리가 났다.
내 감정은 빠르게 휘몰아쳤다. 말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온 몸으로 화났음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남편의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나와 아이를 무시하려던 것이 아니라고 받아들이려고 우러나지 않는 마음을 쥐어짜고 있었다. 하지만 분노는 폭풍처럼 나를 흔들었다. '죽고 싶어.'라는 생각이 들고 나서야, 심리 치료 중에 받았던 피드백이 떠올랐다.
"감정을 표현해야 해요."
분노의 설거지를 중단하고 곧장 방으로 들어가서 심리 치료 선생님을 찾았다. 내 감정을 마구잡이로 토해내자 울컥, 눈물이 올라왔다. 마음속 작은 내가 말했다.
"이게 울 일이야? 너 지금 울면 애들도 놀라고 남편도 너 이상하게 생각할 걸."
손으로 눈두덩이를 꾹 눌렀다. 입을 열면 울까 봐 한참 마른침만 삼키다가 겨우 한 마디 뱉었다.
"화나고 짜증 나고.. 힘들어요."
작은 내가 다시 말했다.
"어쩌겠어. 결국 너만 손해야. 짜증내고 화 내봤자 바뀌는 것도 없고. 별 것도 아닌 일에 왜 그래?"
나는 수긍했다. "어쩌겠어. 많이 바빴겠지. 그렇다고 이렇게 화내는 나 진짜 저질이다."라고.
선생님은 나에게 그 감정을 인정하고 표현하라고 독려했다. 애써 눌러 담던 감정이 일렁였다.
"울어도 돼요."
한 마디에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울음이 밀려 올라왔다. 울면 안 된다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한번 터진 눈물은 쉬이 그칠 줄 몰랐고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채 아이처럼 크게 울었다. 집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울음을 꺼내놓았다. 남편은 그런 나를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섰고, 나는 더욱 서럽게 목놓아 울다가 잠이 들었다.
얼마쯤 잤을까. 일어나 보니 아직도 집에 혼자였다. 아이들이 오기 전에 기분을 좀 끌어올려야 할 것 같아서 무작정 집을 나섰다. 집 근처를 배회하다가 평소 마시고 싶었던(하지만 수유 때문에 참았던) 라테 한잔을 샀다. 커피숍 탁자에 엎드려 숨을 골랐다. 그런데 점점 머리가 아파왔다. 더 있다가는 쓰러질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서둘러 집에 돌아와 이불 위에 웅크리고 누웠지만 두통은 점점 더 심해졌다.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남편이 아이들과 함께 곧 돌아왔고 배고픈 아이는 가슴팍으로 파고들어 젖을 찾았다. 두통으로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누웠지만 계속 속이 울렁거렸다. 실컷 젖을 먹은 아기가 웃으며 배 위로 올라왔다. 아이가 손으로 가슴팍을 누르자 울렁거리던 속이 울컥 올라왔다. 곧장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토했다. 하루 종일 먹은 것이라곤 라테 한잔뿐인데, 그게 체했던 모양이었다.
커피 한 잔을 다 토해내자 거짓말처럼 속이 편안해지고 두통이 사라졌다. 허기가 느껴지고 식욕이 돌았다.
미친 듯이 울고 나니 마음의 응어리도 티끌만큼 풀렸는지 한결 후련했다. 무슨 말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토해내지 않고 꾹꾹 눌러 담은 감정이 마음속에 체기로 남아있었나 보다.
거친 분노를 눈물로 한번 거나하게 쏟아내고 나니 감정의 파도가 가라앉았고, 그 안에 진짜 내 감정이 보였다.
나의 힘듦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
나와 가족이 소중하다고 느낄 수 있도록 행동해주길 바라는 마음.
존중받고 싶은 마음.
이게 내 진짜 속마음이었다.
남편에게 내가 느낀 감정을 오롯이 말로 표현했다.
무시받은 것 같았고, 나에게 모두 떠넘기는 것 같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 같지 않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