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는 작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당연히 만질 수도 없다. 심지어 생물인지 무생물인지 경계도 애매하다. 혼자 놔두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세포가 하나라도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바이러스는 세포 속으로 들어가 복제를 시작할 것이다. 진화할 것이고 때로는 돌연변이를 일으킬 것이다. 숙주와 공존할지, 숙주를 죽일지 알 수 없다. 그건 숙주에게나 중요하지, 바이러스는 그저 존재할 뿐이다. 바이러스 혼자 있어도, 세포 속에 들어가 있어도 '그저 존재한다'는 명제는 변함없다.
돌이켜보니, 내 인생의 핵심이 무엇인지, 내 인생을 꿰는 한 단어가 무엇인지, 어떤 삶을 살았고 꿈꾸는지 늘 궁금해하며 살았다. 시선은 늘 과거나 미래에 두고 지금의 나를 불안해하고 못마땅해했다. 나의 지난날에 비추어 볼 때, 내가 목표하는 미래를 생각할 때, 내가 지금 하는 일들은 하나같이 쓸모없어 보였다. 군인이었던 과거에서 출발하면 생뚱맞은 바이러스가, 바이러스에서 출발하면 육아 때문에 조각난 짧디 짧은 경력이 발목 잡았다. 뭉뚱그리자니 맛깔난 비빔밥도 아닌, 옛날 시골 개밥 같았다. 덕분에 자존감과 자신감은 바닥을 쳤고 어떻게 해야 회복할 수 있을지 감조차 잡지 못했다. 하이에나처럼 내 우울과 좌절을 쏟아부을 '꺼리'를 찾아다녔다. 공부든, 청소든, 육아든, 욕이든, 뭐라도 해야 했다.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으면 그대로 내 인생이 땅으로 꺼질 것만 같았다.
와중에 이야기 나눌 사람도 없어 시작한 글쓰기였다. 글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칠 수 있는 나만의 대나무 숲이었다. 덧붙여, 일관성 없이 흩어진 삶의 방향을 한 곳으로 모으고도 싶었다. 머릿속으로 아무리 이리 재고 저리 재며 계산기 두들겨 봐도 답이 안 보여서 글로 끼적이면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버릴 것들은 버리고 채워야 할 것들은 채우고 싶었다. 동시에, 이렇게 살다가 아무것도 되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고 해서 함부로 살아낸 인생이 아님을 기록해두고 싶었다. 그래서 썼다.
현재를 쓰다 과거를 만났고, 과거를 쓰니 현재가 보였다. 글을 쓰자 나의 삶이 비로소 연결되었다. 버릴 기억은 없었다. 내가 걸어온 모든 길의 모든 순간이 나였다. 조바심 나고 두렵고 설레고 우울했던 그 모든 시간들이 나를 만들었고, 그 자체가 나였다. 진정한 "connecting THE dots"의 실현이었다. 나는 무릎을 쳤다.
깨달은 바가 있다. 지금 하는 일의 의미를 단정 짓지 말자는 것. 미래의 나에게 닿는 디딤돌일 수도, 새로운 나를 만드는 변곡점일 수도 있다. 어떤 일이든 내가 의미를 부여하기 나름이다. 그러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쩌면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숨 쉬는 공기조차 낭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력하고 쓸모없는 날들을 살고 있을 수도 있다. 진짜로 그렇게 믿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옭죄이고 있거나, 해도 안될 거라고 지레 풀 죽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랬듯이, 지금도 가끔 그렇듯이 말이다.
그래도 괜찮다. 잠시 숨 고르기 구간이다. 애써서 뭔가를 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내 삶의 점이 찍힌다. 그저 단단히, 담담히 현실에 발 딛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힘 있고 멋진 점이 되어 줄 테니까. 혼자 동떨어져 있든, 어딘가에 속해있든 '나는 그저 나'라는 사실만 기억하면 된다. 그저 존재하기. 나로 존재하기. 어떤 순간에도 나를 잃지 않는 것. 내가 글을 쓰며 찾은 핵심 포인트다.
자, 그럼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내 삶의 무수한 dots가 가리키는 곳은 어디일까.
글쎄다. 미래는 알 수 없다. 내가 앞으로 찍을 점이 가르쳐 주겠지. 만들어 가겠지.
결국 방향은 내가 결정하고, 어떤 쪽이든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 만큼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