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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도동꿀벌 Oct 23. 2021

마감과 디저트

마감 노동자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요즘 말로 ‘국룰’이 하나 있다. 바로 ‘글은 마감(시간)이 써준다’는 것이다.


 아무리 마감 시간이 넉넉하게 주어졌대도 마찬가지다. 발등에 떨어진 불이 활활 타올라야만 비로소 글이 나오는 것은 나를 포함한 많은 마감 노동자가 호소하는 증상이다. 특히 데드라인이 30분 이내로 남았을 때 발휘되는 집중력은 그야말로 초인적이다. 심장이 쫄깃해지도록 마감을 하고 나면 일종의 퀘스트를 깬 듯 쾌감에 휩싸이기도 하는데, 러너들이 경험한다는 ‘러너스 하이’가 이런 기분일까 싶다.


 적절한 데드라인이 질 높은 글의 전제 조건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마감 시간과 글의 퀄리티가 늘 정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10시간이 주어진다고 해서 5시간 동안 쓴 것보다 2배 좋은 글이 나온다는 보장은 없다는 말이다. 앞서 말했듯 글은 (코앞에 닥친) 마감이 써준다.


 이러나 저러나 제한된 시간에 일정한 퀄리티의 결과물을 내놓아야 하는 이상, 마감을 1분이라도 앞당기고 조금이라도 나은 기사를 쓸 수 있다면 무엇이든 동원하고픈 법이다. 샷을 추가한 아메리카노, 유튜브에서 찾은 ‘집중 잘 되는 음악’,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노이즈 캔슬링 장비까지. 마감 노동이 아니더라도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능률을 높이는 자신만의 비법 하나쯤 있지 않을까.


발등이 튀김이 되기 직전, 마감에 기름을 부어 주는 단 것들


 이쯤 되면 눈치챘을 것이다. 나는 마감할 때면 디저트에게 SOS를 친다.


 어느 하나에 꽂히면 질리도록 그것만 먹기 때문에 그간 먹어온 ‘마감용 디저트’의 역사도 시기별로 구분할 수 있다. 입사 초기에는 근무지 인근 프랜차이즈 커피집에서 파는 잉글리시 머핀에 중독돼있었다. 보통은 그냥 머핀으로, 가끔은 베이컨과 치즈를 넣은 것으로 골라 밥 대신 먹었다. 어느 해 겨울에는 회사 앞 노점에서 파는 붕어빵에 꽂혀서 주머니에 현금을 꼭 들고 다녔다. 어느 시기에는 화이트 초코가 콕 박힌 말차 마들렌을, 또 한동안은 까눌레와 스콘을 부지런히 사 먹었다. 덕수궁길 초입에 있는 L 와플집의 메이플 와플은 줄을 서서라도 한두 달에 한 번쯤 꼭 먹었다. (인근 유○면에서 냄비국수를 먹고 이 집 와플을 먹는 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코스 중 하나다.)


 2020년에는 그해를‘마카롱의 해’라 불러도 좋을 만큼 많은 마카롱을 먹어 치웠다. 코로나19로 재택근무를 시작한 해였는데, 오전 11시40분쯤 집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3분 거리의 C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마카롱 한 개를 사 들고 총총 집으로 돌아오는 게 한동안의 루틴이었다. C 카페의 마카롱은 테이크아웃 전문점의 그것치곤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애정 어린 눈으로 보더라도 만듦새는 어설펐지만 유치하게 단맛이 당 중독자의 입맛을 확실하게 저격했다. 얼마 전 동생과 디저트 이야기를 하며 지난해 먹은 마카롱의 숫자를 대충 세었다가 대략 150개쯤 된다는 걸 깨닫고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저 하루하루 소확행을 실천했을 뿐인데… 작은 행복이 모여 당뇨가 올 뻔했다.


 마카롱을 150개나 먹은 지난해의 나를 변호하기 위해서는 재택근무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MBTI가 I로 시작할 것이 틀림없는, 혼자 있어야 비로소 충전되는 내향적인 성격임에도 재택근무는 정말이지 미칠 노릇이었다. 사람이 그리웠다. 어느 정도였느나면, 일주일에 한 번 있는 팀 회의 겸 회식을 손꼽아 기다렸다. (이전 글에서 밝혔듯 나는 술을 한 방울도 안 마신다.) 1차로 회식 자리가 끝나면 너무 아쉬워서 ‘이대로 집에 갈 거냐’는 눈빛을 쏘아댔다.

맙소사, 150개나 먹었을 줄이야. 아직 몸이 괜찮은 게 다행이야.


 외로운 재택근무에 즐거움을 한 스푼이라도 더하려면 조치가 필요했다. 휴대전화 지도앱에 동네 디저트집들을 북마크 해놓고 하나둘 섭렵하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다. 월요일은 S 베이커리의 크루아상, 화요일은 시장 꽈배기 집의 팥 도넛, 수요일은 C 카페의 조개롱(꼭 조개가 입 벌린 것 같은 모양을 한 마카롱을 이렇게 부른다), 목요일은 S 빵집의 바질 크런치를 먹는 식이었다. 가끔은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옆 동네 베이커리에서 다쿠아즈를 사다 먹기도 했다. (내가 사는 동작구 상도동은 빵순이들 사이에서 나름대로 명성이 높은 동네다. 맛있는 빵집과 디저트 가게가 몰려있기 때문인데, 빵순이들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 ‘빵소담’에서는 상도동을 ‘빵도동’이라 부르기도 한다. 날을 잡고 ‘빵도동 빵지순례’를 하는 하는 이들도 있다.)


 이제 와서 조금 솔직해져 보자면, 디저트가 마감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미미한 것 같다. 디저트 이야기 실컷 해놓고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그렇다. 먹어 치운 마카롱만큼 좋은 기사를 썼다면 아마 나는 온갖 상을 휩쓸고 다녔을 것이다. 마감 시간과 결과물의 퀄리티가 비례하지 않듯, 투입하는 디저트도 마찬가지다.


 그럼 결국 글을 써주는 것은 무엇이냐. 마감이다. 이 글 또한 마감이 없었다면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마감하는 동안 잠시라도 행복할 수 있다면 먹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한 가지 고민은 어차피 매일 해야 하는 마감, 조금은 건강하게 했으면 하는 것인데 이 글을 쓰면서도 오동통한 단팥크림빵이 필요했던 걸 보면 당장은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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