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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비 Jan 08. 2020

최초, 그리고 최후의 로맨스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희망을 주는 소설들이 있다. 이 정도는 나도 쓸 수 있겠다 싶은. 내 감정의 혼탁함을 주체하지 못하고 일기를 휘갈기던 어느 날 문득, 내 감정의 결대로 한 개씩 입체적인 목소리들이 모여서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움직일까를 쓰고 싶다면, 이것은 소설의 시작이 될 수도 있겠다는 용기가 난생처음 생겼다. 누군가는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아서 소설이 쓰고 싶을 수도 있겠다는 짐작. 나도 하고 싶은 얘기는 제법 있는 것 같은데 소설 쓰는 데 자격증은 필요하지 않으니까 언젠가는 쓸 수 있지 않을까 용기를 주는 소설들은 세상에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에밀 아자르는 빌어먹을 작가다. 소설이라는 건 나 따위는 살아생전에 한 문장도 쓸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심지어 두 개의 이름이라니. 할 수만 있다면 두 번의 공쿠르 수상은 세상에 대한 최고로 멋진 복수 중 하나가 아닐까. 책을 읽을 때 마음에 드는 문장은 줄을 치지 않을 수가 없는데, 이 책은 동화 같은 이야기 사이사이에 처절하지만 너무나 간단한 생의 비밀들을 슬깃슬깃 한 문장씩 숨겨놓아 딱 어떤 문장만 줄을 치거나, 또는 어떤 문단은 통째로 흐르듯 읽고 지나가게 하질 않아서 나를 난감하게 했다. 모든 문장에 밑줄을 쳐서 간직하고 싶은, 비망록을 만들 수 없는 소설. 스물여섯쯤 읽었을 땐 책을 덮으며 인생은 이런 거지 하며 찔끔 울었던 것 같은데 서른이 끝나는 무렵에 읽으니 모든 구절에 새록새록 마음이 아팠다. 이런 젠장할 생이여. 


아이가 가난하고 힘들지만 씩씩하게 살아가는 이야기는 사실 익숙한 포맷이지만, 캔디나 앤같이 반듯하게 자라나는 아이의 신파는 내가 느껴야 할 감정을 정방향으로 가리켜서 김이 새는 느낌이다. 새벽엔 자욱하지만 아침 해가 뜨고 나면 사라져 버리는 안개처럼 금방 걷히는 감동이랄까. 억척스러운 아이의 순수함과, 세상의 거짓과 자신의 처지를 심장이 터지도록 잘 알고 있지만 시치미 뚝 떼고 괜찮다고 허세를 부리는 남자아이의 연약함은 분명 그 슬픈 서정성의 결이 다르다. 허락된 것보다 더 적게 누리는 애정에 대한 끝없는 갈구와,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할 수 없이 더 과분하게 지워진 생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두려움 속에서 허우적대는 모모를 보면서 사는 게 뭔지 싶은 안타까움과 함께, 그렇지만 이런 생이라도 입술 깨물고 겸허히 하루하루 악착같이 살아야만 내가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나의 오랜 집착을 다시금 게워낼 수 있었다. 스물여섯일곱, 가장 아름다운 나이에 생을 마감해버린 자들을 떠올리면서,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어차피 그 선을 넘었으면 이제 추해질 일만 남았다 해도 끝까지 살아보아야겠다는 결심 같은 것을 했던 기억이 난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인간적인 외로움과 결핍의 애정에 관한 작은 서사. 


이 책을 내가 한 줄로 줄인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늙음과 늙어감, 병듦과 죽어감, 내세울 것 없는 외모, 가난과 천한 직업, 신분의 불안정, 가족의 부재, 없을지도 모를 미래의 희망,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랑해야만 한다는 것. 좋은 소설은 직접 하고 싶은 말을 뱉어버리기보다 숨기고 숨겨서 더 그 감정에 다가가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생이라는 단어를 이토록 노골적으로 빈번히 주체적으로 사용하면서, 삶과 죽음을 소재로 왜 사는 거냐고 반복적으로 물어보는 데도 불구하고 나는 이 소설을 거부할 수 없었다. 언제부턴가 하루하루 반복적인 삶을, 그저 살기에 급급하다는 것을 알지만 멈출 수 없는 서글픔이 내 마음을 떠나지 않기 때문일까.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매달려본 내 아픈 추억들 때문일까. 사랑은 물 같은 것. 매일 일정량을 마셔줘야 살 수 있다. 역시 사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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