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에에에세이] 결혼조차 욕망이 유틸리티를 넘어야 가능한 것
한밤중에 휴대폰으로 한창 이사 갈 집을 고르고 있는데 갑자기 보이스톡이 온다. 화면에서 얼른 손가락을 뗀 후 침착하게 오프 버튼을 눌렀다. 다행히 바로 전화벨은 꺼졌고 다시 검색을 하려고 화면을 여는데 또 보이스톡이 울린다. 한 동안 잊고 있었던 익숙한 짜증이 치민다. 건 시간도, 건 방식도, 건 사람도.
물론 나도 안다. 받지 않을 줄 알면서,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무력하게, 그렇지만 집요하게 걸어봤으니까. 그래도 난 이미 오래전에 박살난 줄 알면서도 첫사랑을 놓치지 않으려는 스물다섯이었고, 더 쥐면 으스러질 줄 알면서도 차마 주먹을 펴지 못해서,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그랬다. 그때의 나도, 그 첫사랑도, 그리고 지금 나에게 전화를 걸어대는 이 친구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내가 말할 수 있다면, 내가 해줄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대우는 전화를 부재중으로 두는 일. 걸고 싶은 사람은 전화를 걸게 놔두고 싶다.
3년 전 어느 날, 늘 언니 언니 하면서 잘 따르던 후배 하나가 동갑내기 남편의 의대 동기가 있으니 소개팅을 하라길래, 연하 남자 의사가 미치지 않고서야 나를 만나주겠니, 라며 웃어넘겼는데 의외로 만나보고 싶어 한다길래 더운 여름날에 시원한 맥주나 한 잔 먹고 와야겠다, 라며 소박하게 나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음 오늘은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가겠군, 라는 촉이 왔는데 의외로 그 날은 뭔가 술술 풀렸다. 약간 성가신 타입이지만 ‘말’이 재미있는 사람이었고 그 날의 대화는 각자의 일, 정치, 읽었던 책 얘기, 학교 얘기로 정신없이 흘러갔다.
난생처음 ‘이상형’이 아닌 사람과의 만남이 시작되었고, 인생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오래 살고 볼 일이구나를 실감하며, 신나는 몇 주간의 주말을 보냈다. 항상 누군가가 보고 싶어야 연애하는 기분이 들 것 같았는데, 나를 그리워하는 하는 사람의 응석을 들어주고 나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그 마음이 애틋해서 좋았다. 이런 계산 없는 호의와 친절을 받아본 게 언제가 마지막이더라. 매사 전투적으로 임하는 내 마음과 세상의 경계가 풀어져서, 뇌의 시야가 흐릿해진 몽롱한 행복감.
문제는 항상 나다.
애정의 사슬이 죄여 올수록 점점 숨쉬기가 힘든 느낌이었다. 나에게 하나씩 묻지도 않은 비밀을 털어놓기 시작하더니, 주중에는 항상 같은 시간에 취한 채 전화를 걸고, 내가 떠날까 봐 불안해했다. 물론 점점 말이 없어지는 나를 보면 그럴 법도 했다. 만날 때마다 술을 마시고, 술에 취하면 같은 레퍼토리가 반복되고, 나에게 순도 높은 애정을 요구하고, 우리 집을 언젠가부터 ‘서울집’으로 부르는 게 버거워졌다. 금요일 오후 6시 퇴근하자마자 득달같이 서울로 달려와서 일요일 밤 9시에 내려가는 이 저당 잡힌 내 주말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오래간만에 연애하는 딸 때문에 한껏 들뜬 우리 엄마와 그의 어머니와 그가 번갈아가며 ‘대학원은 그래서 언제 졸업이니’라고 물어보던 2016년 가을에는 날 받아놓은 사형수의 기분이었다. 나 이대로 끌려가서 ‘결혼당’하는 건가, 도축장에 들어가는 트레드밀 버튼을 내 손으로 눌러버린 느낌. 언젠가 나락으로 떨어져서 후회도 못하고 혼자 입술을 깨물며 빈 방에서 절망할 것 같은 불안감.
밖에서 보는 상황은 나에게 우호적이었다. 네 살 어린 의사랑 연애한다며?라는 카톡을 심심치 않게 받았고, 사람들이 얼굴이 좋아졌다고 얘기해주었다. 항상 세상에서 가장 미안한 부모님에게도 일단 얘기했다.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있는 팩트니까. 티 내지는 않아도 뭔가 기대하는 움직임이 느껴졌고 약간 후회는 되었지만 될 대로 돼라 싶었다. 평생 남들 결혼 이야기, 손주 이야기 속에서 단 한 마디도 못한 우리 엄마 아빠 생각하면 내가 죄인이라서.
점점 내 마음과 생각은 결론을 향해 가고 있는데,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시점 이후로는 만나면 말의 루틴이 일정해졌다. 마음이 닫히니 말이 안 나왔고, 대답이 짧아지니 눈치를 보게 되고, 그러다 또 혼자만의 섭섭 포인트가 역치를 넘으면 눈물과 투정이 시작되었다. 다 내가 지긋지긋하게 해 본 것인데, 내가 저 마음 아는데 싶으면서도 그 짧은 밑천의 반복되는 주정 레퍼토리는 참아내기가 힘들었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게 죄도 아닌데 술 마시다 혼자 속상해서 테이블 밑에 손 얌전히 포개고 고개 꺾어 숙인 채 시위하는 남자라니. 물론 오랜 연인이었다면, 어쩌겠어, 나라도 너 데리고 살아야지라며 최소한 연민이라도 생겼을 텐데, 미안하지만 상대도, 시점도 잘못 골랐다. ‘남자는 개 아니면 애’라는데 이 남자는 ‘강아지’였다. 주인에게 미친 듯이 복종하며 머리 쓰다듬어 달라고 달려드는. 그래서 그렇게 부끄러움도 염치도 없이 배 까뒤집어서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스물다섯에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하면 내 진심을 알아줄 줄 알고 그랬던 것처럼.
불행히도 나는 연애나 관계에 있어서 ‘주인의식’이 희박한 사람이라,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줄 수가 없었다. 나는 소울메이트가 필요한데, 아니면 최소한 친구를 원하는데, 그는 내가 ‘매니저’가 되길 바랬다. 내 커리어도 포기하지 않으면서, 본인의 월급통장도 관리해주고, 재테크도 잘하고, 애도 쑥쑥 나아서 막 잘 키우고. 물론 알고 있다. 나는 미션이 주어지면 할 거라는 걸. 최소한 내 안의 내적 동기부여가 된다면, 뭐든 주어지는 과업을 해내는 건 즐거운 일이니까.
여기까지 생각이 도달하자 드디어 관계를 정리할 수 있었다.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헷갈렸구나’
이렇게 조건 좋은 로또 같은 남자 만나 연애하면서 왜 내 마음은 지옥인지, 무엇보다 나만 참으면 우리 엄마 아빠 어디 가서 어깨 펴고 다닐 수 있을 텐데. 나만 참으면 최소 5명이 행복할 것 같은데, 그 행복이 얼마나 찰나일지라도. 나는 왜 또 못 참아내고 내 별 볼 일 없는 나 홀로 인생 지키려고 이다지도 애를 쓸까. 내가 가진 게 너무 많은 건가, 아니면 같잖게도 나를 너무 소중하게 여겨서 그런가. 나 혼자 손해 하나도 보지 않고 세상 살 수 없는 거 잘 아는데, 내가 너무 이기적인 건가.
나는 할 수 있는데 왜 안 하려고 하지, 이 질문에 답하느라 내가 정작 뭘 원하는지 생각해볼 수 없었다. 내가 이 친구랑 같이 하고 싶은 게 뭐지, 같은 배를 탄다면 뭘 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앞이 보이지 않았다. 아, 보였지만 내가 원하는 그림은 아니었다.
여름에 나시 소매 입고 처음 만나, 대학원 2학기가 다 끝나고 졸업을 남겨놓은 겨울 방학이 되었다. 구정 때 대구 가서 부모님 뵙자고, 편지를 써온 친구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얘기했다. 나는 이제 못하겠다고.
다시 생각해보자, 다시 생각해봐라, 다시 생각해달라.
수없이 되묻는 그 질문. 이후로도 수백 번은 더 들은 질문과 부탁.
생각은 정말 대단했다. 한 번 결론을 내리고 나니 바꿀 수가 없었다.
그렇게 저지르고 나니 후에 감당해야 할 내 몫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어차피 치러야 할 값. 세상 공짜가 어딨나.
하고 싶은 대로 했으면 욕 먹어야지.
그래서 구정 때 내려가서 엄마한테는 예상보다 오백 배는 혹독한 대접을 받았고(서울로 쫓겨났다), 아빠한테는 남자 친구랑 헤어졌어요, 말하다 말고 태어나서 처음 아빠 앞에서 대성통곡을 했다. 왜 남들 다 하는 그깟 결혼을 하지도 못하고 이렇게 속을 썩이면서 수모를 겪게 하나 싶어서 그랬던 것 같다. 내가 한심하기도 하고.
옷가게를 십 년 한 지인이 내가 싫은 걸 싫다고 말하는 게 너무 좋다며 ‘나는 마스크를 너무 오래 써서 얼굴에 들러붙었잖아’라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그래서 그 친구가 그렇게 연애를 자유롭게 하는 건가 싶기도 한데, 연애는 가면을 쓰고 할 수 있지만, 오래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매번 솔직할 필요는 없지만 언젠가는 결국 마음이 마주 보는지 확인을 해야만 하는 일. 그래서 다치고 또 자라고 덧나고 또 자란다. 정작 연애 기간 동안은 그냥 마냥 좋기만 했으면 좋겠는데, 날 선 감각 다스리느라, 관계의 세세한 부분 하나하나 다시 생각하고 그게 뭐였지 의미에 몰두하느라 그렇게 자해를 해댄다. 내 마음의 끝까지 가보는 기분. 연애에 적당히란 없다. 데이트는 적당히 할 수 있어도.
그래도 쇼 머스트 고 온, 연애는 계속되어야 한다.
설레는 감정이 왔을 때, 불면 날아갈까 손대면 꺼질까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 세파에 좀 시달리고 사람 좀 만나봤다 싶으니 이제 다 비슷비슷하게 보여서 유형 파악되고 대처방안도 보이니까 도통 설렐 일이 없다. 이건 강요한다고 되는 것도, 심지어 노력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어서 한결같이 새로움과 호기심을 좇는 수밖에 없다. 헨젤과 그레텔이 빵조각 줍듯이 하나하나. 햇살 비치는 거리에 행복한 두 바보가 헤벌쭉 천천히 걸어가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흐뭇하다. 피어나는 대화에서 감지되는 케미에 취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