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에에에에세이] 매력 vs 효용 in 연애
다른 방법이 없었다. 고백은 했고 매일 만나지만 우린 ‘친구’였으니까. 서브를 날렸는데 돌아오는 공이 없으니 대충 원론적인 답은 들은 것 같지만 그래도 같이 매일 있어주는 걸 보면 감정적 진도는 나가고 있는 거 아닌가? 두번째 서브가 필요했다. 투-트랙의 진도 레벨을 맞추기 위한 더 강한 서브.
육/탄/공/세.
약간 치사한 방법이다 싶었지만 너는 스물넷의 건강한 대한민국 남성이니 나에게 반응을 보여주렴. 이게 안되면 수녀원이라도 갈 각오로 돌진. 다행히 통했다. 일단은.
헤어지고 나서 알았다. 사람이 최선을 다해도 안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아니, 실은 만나면서 죽 알고 있었다. 이 친구는 나를 근원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아니구나. 그리고 이건 그 친구가 노력한다고 될 일도 아닌 거구나. 누구에게라도 매력을 느끼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래서 내 두번째 서브는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 것을 주는 일이었다. 이른 바 쓸모, 혹은 효용감. 이거라도 줄 수 있어야 관계가 최소한 ‘시작은 되겠지’ 생각했다.
내 고백은 일년짜리 프로젝트였다. 요리 보고 조리 보고 일년 동안 쫓아다녀보고, 나는 직관적으로 확신했다. 딴 건 몰라도 이 친구랑은 70살이 되어도 대화가 끊길 일은 없을 것이다. 전재산을 통째로 사기 당해서 길거리에 나앉더라도 우리는 농담부터 할 종자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고백을 안할 수가 없었다. 고백한 날 잔디밭에 앉아 가만히 듣던 그가 ‘너한테 그 말만은 듣고 싶지 않았는데’ 라며 뜯어 뿌린 잔디풀을 조신하게 맞으며 엄청 부끄러웠던 기억이 난다. 내가 좋아해서, 내가 고백해서 시작된 이 관계를, 또 일년이 지나 그 친구가 어렵게 받아들였던 밤, 나는 결심했다. 이 관계가 흐물흐물하게 변해가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내가 시작한 일이고, 나는 최선을 다하겠다고. 이 결심은 거의 맹세에 가까웠다. 나는 알고 있었으니까, ‘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엄청나게 시간이 오래 걸렸다. 안되는 일이 있다는 것, 나 혼자 바둥거렸던 것이 무위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지하 63층 바닥에 널부러진 내 정신을 도로 지상으로 데리고 나오기까지. 감정 주파수를 항상 플러스2 정도로 맞춰두고 내가 했던 이 연애질이 미래의 새로운 모험과 실험에서 스탠다드 대조군이 되지 않도록 만들기까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
대부분의 것들은 이제 이해할 수 있다. 망한 연애는 인생의 참교육이니까. 이토록 가까이 타인을 통해 나를 탐구할 수 있는 시간은 없을 것이다. 다만 내가 아직 이 에피소드들을 우려먹는 건, 여전히 내가 답을 내리지 못한 질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가지고 태어나지 못한 많은 것들 중 ‘페미닌’에 대한 콤플렉스, 누군가는 이게 왜 콤플렉스냐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쿨하게 ‘네, 저 그런 거 없구요’가 안되는 종류의 콤플렉스다. 없어도 괜찮지 않고, 그렇다고 꼭 갖고 싶은 것은 아닌데, 엄청나게 동경하는 그것.
연애를 하는 동안 나는 ‘100%의 여자아이’ 역할을 할 수 있었고, 젠더에 대한 나의 인정 욕구는 완벽하게 충족되고 있었다. 내가 무슨 옷을 입든, 어떤 스타일이든, 무슨 말을 하든, ‘여자’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왜 노력해야 되는 거냐고? 나도 알고 싶다. 도대체 내가 왜 이 부재를 ‘결함’으로 느끼는지.
사춘기 이후로는 열등감때문에 괴로웠던 적은 특별히 없다. 타고난 근자감과 하고 싶은 건 무슨 욕을 먹더라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 남들 앞에서 망신당하는 데 대한 두려움도 오래 기억하는 편이 아니라서 뭐 어쩌라고 정신으로 인생을 버텨왔다. 내 찬란했을 이십대를 앗아간 지방잡대 대신 인서울 취직을 하고, 너무 일찍 아팠던 비루한 몸뚱아리도 운동으로 극복하고, 그 밖에 여러 가지 나의 부족함들을 어떻게든 ‘노오력’으로 메워왔는데, 그렇게 갈고 닦은 효용성을 제공함으로써 나도 가끔씩은 사람들 사이에서 인정받았던 것 같은데.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수많은 나의 여사친들과 마음으로 통하는, 흐뭇한 관계들이 있는데. 그 수많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는 대상들이 있다. 숨죽이고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경탄을 자아내는 오브제들이. 보지 않으려고 해도 내 시선을 낚아채는 그들이. 가까이 가고 싶고, 말을 걸고 싶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정작 본인은 노력하지 않는데 천성적으로 타고난 뭔가가 있는.
내게 텐션을 불러일으키고, 뇌를 활성화시키고, 아드레날린이 뿜어져 나오게 하는, 새로운 생각과 생활의 모티브를 제공하는 남자들. 그들의 멋짐은 아무런 쓸모도 효용도 없다. 그렇지만, 할 수 없다. 그 매력에 압도되어 같이 쓸데 없는 짓을 하고 웃어버리고 싶은 욕구가 분명 있으니까.
나는 그들에게 이런 존재가 아니었나 보다. 단지 연애가 망해왔기 때문에 내가 이성적으로 매력적인 존재가 아니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대개 맡았던 역할은 남자들이 수줍게 고백하는 씬에서 여주를 돋보이게 만들 친구1이나 2였고, 아마 공대생이었어도 아름이가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먼저 제발 고백같은 거 하지 말고 우아하고 의젓하게 가만 있으라는 충고도 수없이 들었지만, 아니 아무 일도 안일어난다니깐요? 할 수 없이 내가 먼저 기다리지 못하고 끌고가는 관계니 역시 혼자 하드캐리하며 혼신의 힘을 다하지 않을 수 없다. 인생에 공짜가 어디 있나.
아무리 주변에서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을 해주어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인정 욕구가 있다. 신형철이 슬공슬에서 말했던 ‘정확하게 이해 받고 싶은 욕구.’ 평생 이것을 제대로 채워보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될까, 생각하면 우습고 막막하다. 애써서 괜찮다고 스스로 말해주어도 결국 거절로 점철된 삶은, 나를 이제 촉수 하나도 내밀 자신이 없는 감정의 단세포로 남게 한다. 모욕한 사람은 없는데 나 혼자 느끼는 수치심으로 쭈그러진 자존심을 다시 팽팽하게 펴주는 것도 또 내 몫인 것이, 내가 선택당한 ‘자유의 삶’이다. 역시 인생에 공짜는 없다.
사는 거 재미 없으면 멋지게 요절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그마저도 타이밍을 놓친 나는 꾸역꾸역 살기로 했으므로 어쨌거나 몰두할 거리를 늘 찾는다. 나를 잊어버리고, 나의 결함조차 잊어버린 채 뭔가를 하고 있을 때 그래도 살아 있는 것 같으니까. 너무 많이 하다보니 자아도취처럼 되어 버린 자기연민을 한가하고 얄팍한 것으로 치부할 힘을 얻을 수 있으니까. 운동은 그 중 제일이다. 얼마 전에 야구 피칭 연습하다 공이 너무 좋다고 말해주는 포수의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았다. 역시 시간과 돈과 의지가 있으면 뭐든 어느 정도는 결과물이 나오는, 이 끊을 수 없는 뿌듯함. 문득 '내가 던진 공이 미트에 빨려들어가는 느낌은 어떨까' 싶었는데 이걸 알 길은 없다. 남들이 아무리 좋다고 말해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