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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한샘 Mar 13. 2020

천박스럽고 야만스러운 맥주, 민중의 와인이 되다.

천덕꾸러기 맥주가 민중의 와인이 되기까지

‘존버’를 통해 고난을 이겨내고 성공에 도달하는 분투기는 위로와 용기가 된다. 무시받던 자들의 복수, 밑바닥 인생의 역전 스토리는 언제나 드라마의 단골 소재였다. 만약 '술의 시대'라는 대하드라마를 찍는다면 주인공에는 누가 어울릴까? 만약 술 세계에 봉준호가 있다면 여지없이 맥주를 캐스팅할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태어난 맥주는 그리스가 패권을 쥐기 전까지 가장 인기 있는 음료였다. 하지만 힘의 균형추가 지중해로 넘어오는 BC 6세기, 와인이 맥주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페니키아인이 전파한 와인은 그리스에게 신이 건넨 선물이자 기회였다. 


산과 구릉이 많은 그리스는 곡물보다 포도와 올리브 농사에 적합했다. 특히 아테네는 와인과 올리브 무역으로 쌓은 부를 통해 지중해의 왕좌를 차지할 수 있었다. 바다 건너 페르시아와 수차례 전쟁을 견뎌낸 그리스는 놀라운 문명을 건설하며 눈부신 문화적 발자취를 남겼다. 



“보리로 만든 메트나 마시는 족속이라니...”


고대 그리스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는 중앙아시아 민족을 맥주나 마시는 미천한 종족으로 묘사했다. 와인은 아름다운 색깔과 향기로운 향미를 가진 신의 물방울이었지만 맥주는 노예들에게 어울리는 시큼하고 텁텁한 음료였다. 


이 흐름은 다음 패권을 넘겨받은 로마에게 그대로 전승되었다. 로마는 그 어떤 나라보다 와인을 즐기고 찬양한 ‘제국’이었다. 브리타니아(지금의 영국), 갈리아(프랑스), 히스파니아(스페인), 그리스, 아시아, 이집트 그리고 북아프리카 까지 인류 역사 상 가장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로마인들에게 맥주는 비천한 술로 취급받았다.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 (출처 위키피디아)
그들은 보리나 밀을 포도주처럼 발효시켜 마신다. 레누스 강과 다누비우스 강 근처에 사는 부족들은 포도주도 사서 마신다….음주와 관련해서는 그들에게 그런 자제력이 없다. 원하는 만큼 술을 대줌으로써 그들의 주벽에 맞장구 쳐준다면…
 - 게르마니아 23장, 타키투스


로마의 북쪽 땅, 게르마니아에는 아직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야만족들이 살고 있었다. 이곳의 춥고 척박한 기후는 포도를 허락하지 않았다. 바바리안이라 불리던 야만족들에게 곡물을 발효시킨 맥주는 신과 함께 즐기는 술이자 안전한 생명수였다. 하지만 2000년 동안 유럽을 지배했던 로마인들에게 맥주란 노예와 야만족들에게나 어울리는 천박하고 야만스러운 음료였다. 로마 귀족들이 사랑했던 와인이 활자와 책을 통해 전수되었던 반면 맥주는 변변한 기록도 남기지 못했다. 

Destruction, Thomas Cole, 1836 (출처 위키피디아)

서기 476년, 게르만 족 출신 오도아케르에 의해 서로마가 무너졌다. 로마의 문명을 누리기 원했으나 능력이 부족했던 게르만족들은 서로마의 문화를 이어나가지 못했다. 게다가 삽시간에 퍼진 흑사병으로 찬란했던 서유럽은 인구의 반 이상이 사라져 버린 죽음의 땅이 됐다. 갈기갈기 찢긴 중세는 로마의 문명을 잇지 못한 채, 그렇게 고통스러운 시기로 접어들었다. 



민중의 와인, 맥주


암흑기, 이 혹독한 시절, 민중들의 위안처가 된 곳은 다름 아닌 기독교였다. 내세를 약속한 기독교는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는 힘이 됐다. 비록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신 건 와인이었지만, 중세 암흑기 시절 평범한 사람들에게 힘을 준 건 맥주였다. 민중들은 맥주를 마시며 전염병을 극복하고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특히 기독교의 수호지였던 수도원은 중세시대 맥주 발전의 큰 축이었다.

최초의 수도사 양조 그림 (출처 : 위키피디아)

수도원은 방문하는 모든 이에게 맥주를 제공했다. 맥주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했다. 신분귀천에 관계없이 맥주를 마실 수 있었다. 맥주 발전의 중심 역할도 수도원에서 이뤄졌다. 문자를 몰랐던 평민과 달리 수도사는 맥주 양조기술을 기록하고 전수할 수 있었다. 맥주는 수도원의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자연스럽게 시간이 지날수록 수준 높은 맥주가 수도원에서 생산됐다. 로마인이 그토록 무시했던 맥주가 그들이 한때 그토록 탄압했던 기독교를 통해 중세시대 사람들에게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맥주의 왕, 사를 마뉴


중세의 혼란을 정리하고 새로운 도약을 이끈 주인공은 샤를마뉴 대왕이었다. 그는 기독교를 중심으로 유럽을 통합하고자 했다. 그 결과, 정복을 통해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회복한 ‘프랑크 제국’의 왕, 샤를마뉴는 9세기 초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서로마 황제의 왕관을 수여받았다. 

샤를마뉴 대왕 (출처 history.com)

샤를마뉴 대왕은 누구보다 맥주를 사랑한 사람이었다. 유럽 곳곳 원정을 다니며 수도원을 세우고 훌륭한 맥주 양조를 독려했다. 과거 로마인들이 그토록 경멸했던 게르마니아 혈통 샤를마뉴가 서로마 제국의 뒤를 잇게 되고, 야만족들의 음료라 불리던 맥주가 유럽의 대표 술로서 올라서다니. 대하드라마 '술의 시대'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이 아닐까. 


중세를 지나며 맥주는 평범한 이들이 사랑하고 즐기는 음료로 성장하게 된다. 알코올 도수가 낮고 식수보다 안전했던 맥주는 아이부터 어른까지 신분과 귀천을 가리지 않고 마셨다. 그뿐 아니라 공동체를 연결하고 고된 하루의 일상을 시원하게 씻어주는 역할도 수행했다. 


21세기 현재, 맥주는 전 세계 모든 곳에서 생산하고 즐길 수 있는 술이다. 남미의 마추픽추, 미국의 알래스카, 그리고 아프리카까지 맥주가 사랑받지 않는 곳을 찾는 게 더 힘들다. 수 천년동안 맥주가 '민중의 와인'이라는 근원적인 가치를 여전히 품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리스 로마 시대 동안 힘들고 고통받던 시기를 버텼던 맥주가 하루하루 고달픈 삶을 사는 우리에게 건네는 메시지는 그래서 아직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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