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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한나 Mar 08. 2024

예쁜 할머니가 될테야

빨간 스포츠카를 운전하는

이 나이에 무슨 꿈이냐고 하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꿈이 없으면 우리네 삶은 앙꼬 없는 찐빵 아니겠는가. 어린 시절부터 계속 바뀌긴 했지만 나는 늘 꿈이 있었다.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피아니스트

미술학원에서 붓을 잡기 시작하면서부터는 화가

점점 예체능에 재능이 없는 걸 알아가고부터는 영어선생님 (그나마 제일 재미있었던 과목이었음)


영어교사는 되지 못했지만 영어강사로 몇 년간 밥벌이하며 먹고살았으니 그나마 꿈을 반쯤은 이뤘다고 말할 수 있을까

by unsplash

얼마 전 집을 정리하다가 초등학교 때 만들었던 학급 문집을 찾았다. 각자의 장래희망을 적는 페이지가 있었는데 내 이름 옆엔 현모양처라고 되어있었다. 그때 현모양처가 뭔지는 제대로 알았을까. 얼핏 초등학생의 꿈 치고는 너무 소박한 게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현모도, 양처도 아닌 그냥 아등바등 살아가는 ‘모’와‘처’가  되어있는 나를 돌아보니 참 큰 꿈을 가지고 있었구나 싶다.




인터넷에서 이것저것 검색하며 시간을 때우다 우연히 본 강연에서 꿈은 동사여야 한다고 했다. 아이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으면 흔히 말하는 의사, 선생님, 운동선수 등 명사로 된 직업을 말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강연자는 ‘의사가 되어 환자들을 어떻게 치료하겠다.’ 혹은 ‘실력 있는 야구선수가 되어 메이저리그에 진출해서 명성을 높이겠다.’처럼 동사를 넣어서 자신이 어떻게 살겠다는 구체적인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영상을 보고 난 후 내 꿈에 대해 생각해 봤다. 


빨간 G60을 몰고 손주들 학원 라이딩을 해줄 수 있는 멋진 할머니.


남편과 차 리콜 때문에 자동차 정비소에 갔다.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수리가 끝나 정비기사님이 ‘1234 차주분! ‘외치면 어린이집에서 하원을 기다리는 부모들이 아이를 찾으러 가는 것처럼 자기 차를 찾으러 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1234 제네시스 차주분! 을 외치는데 화려하지 않지만 단정하게 차려입은 할머니가 종종걸음으로 나가시는 것이 아닌가. 나도 모르게 남편에게 '할머니가 제네시스 끌고 왔나 봐!'라고 속삭였다. 할머니가 대형 세단을 끌지 말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으나, 보기 흔한 장면도 아니기에 갑자기 할머니 등 뒤에서 후광이 비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나이에도 흰머리를 날리며 멋지게 검은 세단을 몰고 나가는 할머니의 모습을 상상해 보니 멋있다는 말 그 이상으로는 표현이 안된다.


아이를 등원시키면서 항상 주차장에 서있는 빨간 제네시스 g70을 볼 때마다 차 주인은 누굴까 새삼 부러웠다. 흰색, 회색, 검정의 무채색 차들 사이에 빨간 g70은 은은하게 붉은빛을 뿜으며 ‘나 여기 있으니 나 좀 봐줘!’라고 외치는 게 아니라  ‘나 어때? 좀 멋지지?’라며 기품을 뿜어내고 있다. 매일 보니 볼 수록 매력 있는 색감과 자태. 이 두 상황이 겹치니 제네시스는 어느새 나의 드림카가 되었다.


아직 운전이 미숙한 나에게 너무 큰 차다. 지금 당장 포르셰에 당첨이 되어도 도로에 나갈 수는 없을 실력. (물론 정말 포르셰를 끌고 나간다면 다른 차들이 슬금슬금 비켜가겠지.) 경제력으로나, 운전 실력으로나 지금은 귀엽고 또 귀여운 경차가 딱.. 하지만 언제까지 경차만 몰 수도 없을 것 같다. 그래.. 일단 꿈이니 꿈을 크게 가져야지!


빨간색 G60. 더 멋진 외제차도 많고, 더 비싼 차들도 많지만 굳이 왜 드림카로 꼽았냐고 묻는다면 드림카 중에서 가장 예쁘고, 운전하기에도 힘들지 않은 크기가 딱 맞을 것 같다. 무엇보다 실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꿈꾸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실용성을 따지다니.. 나도 참 웃기다.)

by naver

내 꿈 이야기를 남편에게 했더니 역시 대문자 T인 남편은 GV60은 있으나 G60은 출시도 안되었다며 퉁명스럽게 답했다. 지금 없는 거지 그때 되면 회사에서 만들지 않았겠어. 꿈인데 마음대로 그런 것도 생각 못하나… 역시 T답다. 


고작 꿈이 고작 손주들 라이딩이냐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손주들을 라이딩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붙는다. 우선 나이 들어서 운전을 계속하려면 체력이 좋아야 한다. 운동 감각도 계속 길러야 할 테고, 시력도 유지시켜야 하겠지. 그리고 G60(비록 지금은 출시되지도 않았지만)을 유지하려면 그만큼의 경제 능력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손주들을 내가 직접 라이딩을 해야 할 테니 내 아이들은 가정을 꾸리고, 뭐라도 되어서 각자 자기 계발이나 경제활동으로 바쁜 생활을 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내가 흰 머리칼을 휘날리며 손주들을 라이딩하려면 경제력과 체력, 그리고 자식의 성공까지 모든 복합적인 배경이 어우러져야 한다. 꿈에 대한 소박한 한 문장 속에는 어마어마한 나의 욕망이 들어있는지도 모르겠다. 내 이야기를 듣고 남편은 옆에서 피식했지만 은근 그 꿈이 이뤄지길 바라는 눈치다. 쳇. 뭐라도 이뤄지면 좋은 거 아닌가. 


2002년에 우리는 그렇게 외쳤다.

“꿈은 이루어진다.”

외치고 또 외치다 보면 내 꿈도 이루어지겠지.


꼭 운전 잘하는 예쁜 할머니가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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