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혼란에 체크하던 시절,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학원은 보통 1시쯤 출근해서 10시가 넘어 퇴근한다. 올빼미형 인간이었던 나에게 이보다 잘 맞는 직업은 없었을 터. 은행이든, 병원이든 일이 있으면 출근 전에 모든 개인적인 일을 끝낸다. 가끔은 출근 전에 백화점이나 마트에 들를 때가 있다. 11시쯤 백화점에 들러 어서 사야 할 것을 사고 출근길에 오른다. 여유 있게 커피를 마시거나, 매장을 둘러볼 여유 따위는 없다. 그때 눈에 띈 건 바로 백화점 안에서 유모차를 밀거나, 아이 손을 잡고 걷고 있는 사람들. 웃음꽃이 피었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랬던 것 같다. 백화점에 온 사람치고 화가 나거나 분노에 찬 사람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분노에 찬 사람이 한 명 있었다면 바로 나였다. 우스갯소리로 백화점은 백 바퀴 돌아서 백화점 아닌가? 백 바퀴는커녕 반바퀴도 제대로 돌지 못하고 종종걸음으로 출근하는 나를 뒤로 하고 쇼핑백을 들고 있는, 커피잔을 들고 있는 그들은 너무 행복해 보였다.
으으으. 두고 봐라. 언젠가 나도 이 회사를 때려치우기만 하면!!!
물론 백화점, 마트는 주말에 가도 된다. 하지만 남들 일할 때 노는 게 더 재미있는 법. 그래서 직장을 다니는 동안 꼭 이루고 싶었던 것이 두 가지 있었다.
평일에 백화점 가기
회사 바로 앞에 있는 스타벅스에 가서 평일에 죽치고 앉아있기
스세권이라는 말이 일상이 된 듯 도심에 살고 있는 요즘, 주변에 스벅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그때는 꼭, 다른 곳의 스타벅스가 아닌 반드시 저 회사 앞 스타벅스에서 평일에 앉아있는 것이 꿈이었다. 한 시간 남짓한 점심시간, 밥 먹고 카페인을 수혈하러 간 그곳에 푹신한 소파에 앉아 커피 향을 음미하기엔 난 너무 바쁘고 초라한 직장인일 뿐이었다. 어서 커피 혹은 생명수를 들고 자리로 복귀해야 한다. 그리고 나면 남들보다 조금 늦은 나의 일과가 시작이다. 바삐 그곳을 뛰쳐나왔지만 커피 향과 소음을 즐기고 있는 그곳의 남은 자들에 대한 부러움과 미련을 두고 왔다.
결혼을 하면서 그 학원을 그만두었고, 결국 난 다시 그 일터 앞의 스타벅스를 가보지 못했다. 핑계를 대자면 새로운 삶에 적응을 해야 해서 거기까지 갈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고나 할까. 어쨌든 나도 임신과 출산, 육아를 하면서 드디어 평일에 백화점에 갈 수 있는 몸이 되었다. 혹자는 애 엄마들이 시간이 많아 백화점에 가서 시간이나 때우며 논다고 말하기도 했다. 어쩌면 나도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리석은 인간은 뭐든 꼭 경험해 봐야 아는 것이니까.
막상 겪어보니 호수를 유유히 떠도는 백조의 모습이 이러할까 싶다. 멋들어진 유모차를 끌고 아이와 눈을 맞추며 웃고 있는 아기 엄마의 모습 뒤에는 극악의 외출준비가 있었다.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나면 흠뻑 땀에 쩔은 엄마의 준비 시간이다. 말이 준비지 씻는동안에도 욕실의 문은 활짝 열려 있을 것이고 세수 한 번에 아이와의 눈 맞춤 한번, 머리를 감으면서도, 거품을 내면서도 아이와의 눈 맞춤은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와의 외출이니 덕분에 화장은 패스다. 준비가 아직 끝은 아니지. 이제는 가방을 챙겨야 한다. 기저귀와 물티슈, 딸랑이등 장난감, 분유와 뜨거운 물이 담긴 보온병. 여기에 이유식을 먹는 아기라면 이유식까지 챙겨야 한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여벌 옷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는다. 완전 군장이란 이런 것일까. 이제 백화점으로 출발할 수 있다면 다행. 만약 아기가 신발을 신기 전… 혹시나 응가를 했다면 모든 준비는 원점으로…
출발을 하기 전부터 온몸의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듯 하지만 이대로 외출을 포기할 수는 없다. 이대로 집에 주저앉다간 또 며칠간 집안에서 성인과의 대화는 단절된 채 옹알이만 하고 있을 수도 있을 테니. 백화점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다. 유모차에서 잘 있어주면 다행, 아니면 난감한 일 시작이다. 만약 낮잠까지 자 준다면 세상 제일가는 효자, 혹은 효녀. 만약 아니라면 여기가 쇼핑의 길인지 고행길인지 알 수 없는 고난의 시작이다. 아기가 큰 볼일을 치르기라도 했다면 유아 휴게실로 빠른 걸음을 재촉한다. 만약 기저귀를 뗀 조금 큰 아이라면, 더 난감이다. 아이를 안고 화장실로 뛰는 것이다. 화장실로 세이프했다면 다행. 그렇지 않은 상황이면…아..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백화점을 이리저리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아장아장 걷고 있는 아기들을 볼 때면 너무 예쁘다. 하지만 이제는 그 반짝 거리는 눈빛 뒤로 혹여나 아이가 다치지는 않을까. 물건을 함부로 만지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부모의 눈빛이 더 크게 보인다.
나 역시 겪어보고서야 아기 엄마들이 왜 백화점에 그렇게 많은지, 왜 그곳밖에 갈 수 없는지 알 수 있었다. 유모차를 마음 놓고 끌 수 있는 곳, 아이의 뒷 처리를 마음 놓고 할 수 있는 곳, 아기가 울어도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곳. 생각보다 주의에서 찾기 어려웠고 몇 안 되는 그곳은 대형마트 혹은 백화점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아해 보이는 그녀들의 모습 뒤에는 물속에서 열심히 헤엄치고 있는 발놀림이 있는 것이다.
아기 엄마들이 웃고 있다고, 집에서 살림 안 하고 커피나 마시고 있다고, 남편은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백화점이나 다니고 있다고 이야기 안 했으면 좋겠다. 물론 웃으며 커피를 마시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그녀들의 삶의 전부가 아닐 테니 말이다. 몇 날 며칠을 성인들과의 대화는 밤잠도 제대로 못 자고 세수는커녕 화장실도 마음대로 못 가는 나날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백화점에서 웃으며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켜는 그 순간은 고래가 숨을 쉬러 물 밖에 잠시 나오듯 그녀들에게 그런 시간이 아닐까.
조금 더 먼저 아기를 키워본 선배맘으로 지금도 육아로 고곤분투하고 있을 아기 엄마들을 응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