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많은 주부들에게 사랑받는 영식 씨를 아시나요?
언젠가 티브이에 서서
집에서 하루에 세끼를 다 챙겨 먹으면 삼시세(혹은 새) 끼
두 끼를 먹으면 두식이
한 끼를 먹으면 일식 씨
라는 말을 들었다. 거기에 집에서 한 끼도 안 먹으면? 영식님이라고…
그러고 보니 주중에는 집에서 밥 먹는 일이 거의 없는 우리 남편은 영식 씨, 아니 영식님쯤 될까.
‘엄마! 오늘 저녁 뭐야?’
어렸을 때, 엄마가 그토록 듣고 싶었던 “엄마! 나 성적 올랐어!.” 혹은 “엄마! 나 책 읽을래.” 대신 엄마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이다. 지금에서야 깨닫지만 “ 내가 ‘엄마!’ 하고 부르면 엄마는 얼마나 공포(?)였을까. 그때는 왜그랬는지지 매일 오늘의 저녁 메뉴가 궁금했다. 특별히 가리는 건 없지만 그래도 기대했던 건 푸른 초원의 나물 반찬 대신, 기름기가 싹 도는 고기반찬이 아니었을까.
우리 엄마는 음식솜씨가 꽤 괜찮은 편이었다. 진미채 볶음을 하는 날에는 프라이팬에 남은 양념으로 진미채 볶음밥을 먹기도 했고, 커다란 냄비째로 식탁 위에 닭갈비가 올라오는 날에는 쫄깃한 주인공인 닭고기와 조연인 고구마, 떡볶이 떡등 골라먹는 쏠쏠한 재미를 느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엄마의 수제쌈장. 주말마다 고기를 집에서 구워 먹던 우리 집 식탁엔 꼭 살포시 엄마표 수제 쌈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된장과 고추장, 그리고 갖은양념이 적절히 조화된, 그리고 중탕으로 살짝 끓인 쌈장. 칼칼하고 매콤한 쌈장은 그야말로 고기와의 환상 조화를 이루었다.
엄마가 만든 피자, 겨울이면 늘 큰 통에 담가 두었던 식혜등 엄마의 사랑은 식탁으로 그려졌다. 집에서는 오븐대신 프라이팬에 갓 구워진 피자 냄새가 솔솔 풍겼고, 한 겨울이면 곰탕솥에 얼음 동동 식혜가 가득했다. 난 한 겨울에도 그 식혜를 먹겠다며 냉기가 가득 찬 베란다에 찬바람을 마주하고 국자로 열심히 퍼 먹었다. 어쩌면 다른 식구들이 식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건 나의 행운이었을지도 모른다.
딸은 엄마의 팔자를 담는다고 누가 그랬나? 난 엄마와 너무 다르다. 성격 다른 건 기본이요, 난 엄마와 달리 살림에 너무 소질이 없다. 특히 음식 하는 게 너무 힘들다. 언제부터였는지 곱씹어 본다. 처음부터 요리에 엉망인 것은 아니었을 텐데. 어린 시절부터의 꿈, 현모양처가 되기 위해 열심히 지지고 볶았다. 어랏! 이게 아닌데.. 싶을 땐 장비 탓을 해본다. 냄비도 사고, 실리콘 주걱도 사고.. 이번에도 아닌데.. 싶을 땐 양념을 바꿔본다. 현명한 엄마는 유기농을 먹이지! 유기농 야채, 유기농 참기름, 재료는 되도록이면 국산으로! 이것저것 해봤다. 하지만 돌아오는 아이의 식판은 끄적끄적 이었다. 일을 하고, 대가족을 이끄느라 요리에 시간을 많이 쏟을 수 없었던 시어머니 덕분에 남편의 입맛은 무난했다. 내가 차려내는 밥상이면 오케이! 하지만 내 배에서 나온 내 새끼들은 왜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인가. 나물반찬이 싫다. 오늘은 왜 고기를 안 먹나. 특히 아이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엘리베이터에서 다른 집으로 향했던 치킨 냄새를 맡았던 날이면 더 그랬다. 우리 집 앞에서 끊겨버린 치킨 향기가 다른 집을 향했다는 것을 알게 된 아이의 표정은 한없이 풀이 죽어있다. 늘 에너지가 넘쳐 방방 거리는 딸이지만 오늘 저녁의 메뉴가 치킨이 아닌 보글보글 된장찌개라면 급 저기압이다. 엄마의 사랑이 가득 담긴 집밥보다는 아직 노릇노릇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치킨, 보글보글 아니, 엄마의 속처럼 부글부글 시뻘겋게 끓고 있는 떡볶이가 으뜸이다. 점점 식탁 위의 반찬 수도, 그릇 수도 줄어간다. 설거지마저 줄여가겠다는 다짐으로 결국은 아이들의 식사는 식판으로. 학교인지, 집인지 모를 식판식 식단을 아이들은 체념하듯 받아들였다. 그럼 이 에너지를 다른 곳에 쏟고 말겠다며 집안 정리를 시작했다. 열심히 쓸고 닦고, 버린다. 하지만 전생에 다람쥐였던 것 같은 둘째 덕에 온갖 살림이 거실로 향한다. 아니 주방으로, 안방으로 온 집안을 휘잡고 다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종이팽이를 그렇게나 많이 접어 주지 말걸… 포켓몬 카드도 사주지 말걸… 살림에 대한 얼마 남지 않은 애정도 식어버릴 지경이다. 주부의 연차와 살림의 실력은 아쉽게도 반비례 그래프를 향해 저 멀리 달려가고 있다.
영식 씨를 핑계로, 엄마의 손길이 담긴 집밥보다는 사장님의 맛깔스러운 솜씨를 더 좋아하는 아이들을 핑계로 내 살림솜씨를 이대로 두어도 되나 싶다. 온 가족이 모이는 주말 저녁식탁마다 매번 새빨간 떡볶이를 내어놓을 수는 없을 일. 계속 볼록 나오고만 있는 우리 집 영식 씨의 복부를 가만히 보고만 있어서도 안 되겠고, 아이의 이마에 하나, 둘 씩 생기는 뾰루지도 다 내 탓인 것만 같다. (물론 사춘기의 호르몬과 아직 손이 꼼꼼하지 못한 아이의 탓도 있겠지만..)그리고 계속해서 빵구만 나고 있는 가정의 경제를 위해서라도 오늘은 마트에서 장을 봐야겠다. 애들의 표정이 비록 일 그러 질 지라도 고기를 가득 넣고 뭇국을 끓어봐야지. 그리고 이 글을 빌어 집에서 밥을 그다지 찾지 않는 우리 집 영식 씨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사랑하는 우리 집 영식 씨에게
얼마 전 당신이 그랬죠. 은퇴 후에는 매일 집에서 놀고 싶다고. 네.. 물론 수십 년간 가족을 위해 직장에 다닌 당신의 노고를 모르는 바가 아니기에 얼마나 쉬고 싶은지 너그러이 이해는 합니다. 다만 난 그 말은 즉 삼시 세끼를 집에서 먹겠다는 이야기로 들리더군요. 남들은 자식들 다 키워놓고 놀러 다닐 나이에 삼시 세 끼라니요. 당신도 그걸 원하지는 않겠지요. 젊은 시절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일한 당신의 노고는 치하할 테니 우리 삼시 두 끼 정도…그리고 한 끼는 외식으로 합의를 보는 것은 어떨지요. 그리고 집밥보다 외식을 사랑했던 사랑하는 영식 씨.. 앞으로도 영원히 사…. 이 좋게 지내봅시다. 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