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사회인, 아니 사람구실 whatever.
예전부터 사람구실을 하고 싶었다. 하루하루가 버겁던 나에게 어쩌면 경제 활동을 한다는 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사람구실'이었고, 돈을 벌어서 나의 버킷리스트를 이루는 것, 그리고 누군가에게 선물을 하고 보람을 느끼는 것은 나의 가장 큰 행복이었다.
물론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람 구실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니 오해 없기를 바란다. 그리고
15여 년간의 내 사회생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행동하는 것보다 공상하는 것을 좋아하고, 현실과 이상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늘 불평과 냉소, 자조적이었던 나는 대학교를 어렵게 졸업했다. 그 이유가 우울증으로 인한 뇌활동의 저하이던, 불안에 기인한 심인적인 이유이던 사회는 '결과'를 원했다. 나는 군휴학까지 포함하여 총 5년간의 휴학 끝에 겨우 졸업을 했는데, 우리 과는 실습을 반드시 해야 졸업이 가능했다. 과 사무실을 찾아 '실습 안 하고 졸업하는 방법은 전혀 없을까요?' 하고 요행을 부리는, 간청하는 내게 조교언니는 '외국인 학생들도 실습은 해요..' 라며 나를 한심+애처롭게 쳐다보았던 기억이 난다.
좋은 사람이 주변에 항상 있었음에도, 사람은 늘 어려웠고 나는 늘 외로웠다. 4학년 때, 나는 진로를 확 틀어서 항공업계에 취업하고자 했다. 실습을 하고 나서 그다음에 결정을 하자고 생각했는데, 실습을 마치며 도저히 안 되겠다고 결심을 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여름방학엔가 홍대에 있는 모 지상직학원을 등록했는데 당시 150만 원의 거금이었고, 여전히 항공 지상직학원은 그 효용성에 대하여 말이 많다. 등록을 하고 몇 주 지나지 않아서 담당 선생님에게 취업자리가 있는데 지원해 보라고 제안이 왔고, 역시나 불안 초조 증세가 심하던 나는 면접 때 기막히게 절었다. 누가 봐도 자질이 의심될 만큼. 근데 그러고 나서도 제발 연락이 오기만을, 내 진심이 닿기만을 바라며 집에 돌아와서 앓아누웠다. 나를 안타까워하시는 부모님과 기적적으로 합격전화를 받았던 그날 저녁이 생생하다.
(후에 직장상사에게 들었는데, 내 자리에 있던 무수한 유능한 직원들이 금방 퇴사해 버리는 바람에 너무 잘나지 않은, 그리고 묵묵히 일할 수 있는 열의가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고 한다) 개인 정보에 대한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약했던 옛날에, 나와 같이 지원한 다른 이들의 이력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정말로 우수한 학벌들이었다. 내가 명함을 내밀기 아쉬울 정도로.
'공항 지상직', 흔히 말하는 공항 여객터미널 체크인 카운터에 매니저 직함을 달고 가장 side에 앉아있는 사람이 나였다. 뿐만 아니라 지점장님의 수행비서 겸, 손님들의 컴플레인 담당 겸, 심부름 꾼.. 등등을 도맡아 하는 남자 직원이 되었다. 여초 과에 여초 직장에- 본의 아니게 여복이 터진 환경이었네..
냉소적이고 약간의 반사회적인 조증환자였던 나는 5년 10개월의 경력을 쌓았다.
이런 고백이 부끄럽지만, 대학 졸업과 동시에 취직을 하고 정장을 입고 '매니저'라는 직함이 나를 우쭐하게 했다. 남들보다 나아 보였고 정말 중요한 사람이 된 것 마냥 다른 직업에 대해 우월감을 가졌던 것 같다. 약간 머리에 피가 안 마른 20대 중후반 남자애를 생각하시면 되겠다.
그러고 나서 지금의 회사에 신입으로 입사를 했다. 우리 회사는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소위 '네임밸류'를 가진 회사다. 세계적이고 체계적인. 연초에 그룹 사장으로부터 2조인가 몇조인가 경이로운 profit을 달성했다고 자축하는 전체 메일을 받았는데 안타깝게도 'PS'라고 불리는 PROFIT SHARE는 없다.
나의 겸손함은 거기서부터 시작했다. 고압적이고 우쭐거리는 내 근무방식과는 사뭇 다른 회사의 분위기에서 얼마간의 '얼탐'의 시기를 가졌다. 그제야 인천공항을 움직이는 만여 명의 다양한 구성원들을 존중하고,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며, 나 역시 주변사람들의 헌신과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자각하고 나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