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금으로 밥솥을 샀습니다.
나는 혼자산지 4년 차 된 1인 가구다. 밥 챙겨 먹는 게 일이다. 요리를 할 줄 모르는 탓이다. 또 일찌감치 요리에 선을 그은 탓이다. 밥 짓는 일은 삶의 다른 과제들에 일찌감치 밀렸다. 회사 일은 물론이고 퇴근하면 운동, 부동산 공부, 브런치 글쓰기, 사이드 프로젝트 등으로 밥 하나 챙길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간편식으로 도피했다. 밥도 햇반에 위탁했다.
이런 내가 퇴직금으로 밥솥을 샀다. 그동안은 햇반으로 연명해 왔지만 이제는 좀 수고로워지기로 했다. 건강과 물가 문제도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요리하지 않는 삶에 회의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 밥을 못 챙기는 이유가 말이 안 되는 것 같았다. 일과 회사가 나를 챙기는 일보다 우선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일하고 있을까? 내가 있고 나서 일이 있고, 회사가 있는 것인데 그것들 때문에 나를 돌볼 시간이 없다니. 직장 생활을 하는 12년 동안 나를 돌보기보다는 너무 앞만 보고 달려온 것이 아닌가? 일은 왜 하는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니 나를 더 챙기고 싶었다. 모든 것을 덮어 두고 숨을 고르는 시간이 필요했다. 내 인생에서는 ‘나’가 먼저였다.
물론 요즘같이 바쁜 현대 사회에서 모든 것을 내 손으로 할 수는 없다. 역사적으로도 인류는 점점 분업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옛날에는 직접 농사해서 자급자족했지만 점차 농작물도 한두 가지로 전문화하고 내 것을 다른 사람과 교환하며 살아가게 됐다. 이런 흐름 속에서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자영업자와 기업이 등장했고 직장인인 나는 나만의 전문분야를 만들어 가면서 내 밥을 그들에게 위탁하는 것이 숙명이다.
그래도 뭔가 찜찜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내 손으로 가능한 부분인지, 스스로 컨트롤 가능한 부분의 한계를 결정하고 건강을 지켜내기 위한 위탁의 바운더리를 정할 수 있는 기회를 우선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우선 명확하게 알고 싶었다. 지금까지는 솔직히 무지성 위탁이다. 유난 같기도 하지만 좀 더 내 삶을 나에게 맞는 방식으로 꾸리고 싶었다. 그래서 식단에서 가장 근간이 되고 있는 밥부터 내 손으로 지어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퇴직금으로 밥솥을 사게 된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시간과 체력이 없었던 게 아니었다. 남는 그것들을 내가 아닌 외부로 돌리고 있었다. 물론 부동산 공부, 브런치 글쓰기, 사이드 프로젝트 등 게을리 보내지 않은 시간도 있었지만 분명 이것들을 하고도 남은 시간이 있었다. 이 시간을 다른 사람의 삶과 생각이 담긴 콘텐츠를 보는 데 썼다. 도움이 되는 콘텐츠도 분명 있었지만 킬링타임용으로 흘려보낸 시간도 결코 적지 않다. 또 이 시간은 다른 이의 삶의 방식을 부러워하며 괴로워하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햇반으로 아낀 시간을 엄한 곳에 쓰고 있었다.
내 행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콘텐츠를 소비하는 시간을 줄이기로 했다. 대신 나를 챙기는 데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퇴사하고 요리를 시작했다. 나를 돌보려는 시도다. 말처럼 거창하지는 않다. 밥부터 시작했다. 너무 어려운 목표, 큰 목표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한다. 이제 내 인생은 외주로 맡기기보다는 소박한 가내수공업으로 살고 싶었다. 내 남은 에너지를 외부에 소모적으로 흘려보내기보다는 나를 위해 쓰고 싶다.
시간이 많음에도 밥 하기 귀찮을 때가 있다. 그럴 때에는 이렇게 생각한다. '어차피 시간 남아도 다른 사람의 삶이 담긴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볼 거잖아? 그 시간에 나를 위한 밥을 짓자.' 생각하면 무겁던 엉덩이가 움직인다. 내가 만족하는 삶을 찾아 타인의 기준에서 자유로워지고 스트레스를 최소화하는 삶에 대한 의지겠다. 작더라도, 소박하더라도, 별 것 아니더라도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은 스스로 해내고 나만의 기준으로 살고 싶은 마음이다. 내 밥은 내가 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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