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품위있는 그녀 Aug 19. 2024

온전히 슬퍼할 수 있는 용기

나를 위해 충분히 슬퍼할 수 있는 시간

가끔 드라마나 리얼리티에서

등장인물들이 내면의 상처를 이야기할 때 울컥울컥 한다.

내 이야기라도 하는 듯 감정이 이입되기 때문이다.


30년 넘게 외면했던 내 마음속 상처받은 어린아이는

한번 모습을 드러낸 후엔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충분히 위로하고 달랬다 생각했건만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갓난아이를 집에 데려와 그 아이가 목이 터져라 울 때 발을 동동 구르던 초보엄마의 모습 같다.

젖을 먹여도, 기저귀를 갈아줘도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그런 아이 옆에서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그만큼 내면의 상처받은 아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

누구는 말한다.

지난 일이니 다 잊어버리라고, 한번 터놓고 이야기했으니 됐다고.

또 누구는 말한다.

그 시대의 어른들은 다 그렇게 컸다고, 초연해질 때도 되었다고...


그런 얘기를 듣고 나면

지난날의 상처를 툭툭 털어내지 못하는 내가 유별난 건가?라는 생각이 든다.

나를 알기 위해 꺼냈던 어린 시절의 상처가

타인의 잣대와 말로 또 다른 상처를 만들어 낸다.

.

잊어버려려해도 한번 덧난 상처는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상처받은 어린아이가 나타나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렇게 슬픔과 위로. 슬픔과 위로를 반복했다.

'그냥'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나는 뭐든 오래 걸리는 사람이니 이 아픔을 달래는 것 또한 오래가겠지'라고 인정하니 마음이 좀 후련했다.

눈물이 흐르면 흐르는 대로

생각이 나면 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마음 한구석에서 슬픔이 밀려오려 하면, 다른 생각으로 떨쳐내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처음 내면의 상처를 마주했을 때보다 울적함이 오래가지 않는다.

나타나는 빈도도 줄었다.

.

내면의 아이가 언제 어디서 불쑥 모습을 드러낼지 모른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때의 내 마음을 충분히 살피는 것이다.

타인의 잣대로 인한 죄책감과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은 버리고, 온전히 내 감정에 집중하려 한다.

그러다 보면 답을 스스로 찾아가겠지




좋아하는걸 더 좋아한다는 제목에

슬퍼할 수 있는 용기란 글을 게시하기전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긍정적인 내용의 글이 아닌데 이게 제목과 어울릴까?

제 내면에는 즐겁고 긍정적인 부분들도 있지만

어둡고 어린시절 받았던 상처들도 공존했습니다.

그 상처를 외면하기 보다 마주하고 나를 달랠수 있을때

비로서 삶의 행복과 즐거움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독자분들은 각자의 상처를 어떻게 달래고 계신가요?

댓글로 이야기해주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