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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월상담소 양희조 Oct 16. 2021

애도를 연습하다는 게 가능한가요?

불가능해요. 하지만 의미가 있을 거예요. 



  잠시, 같이 상상해볼게요. 아주 작은 보폭으로 마치 산책하는 것처럼 이 글을 천천히 읽으며 함께 상상해보면 좋겠어요. 





  자 당신 앞에는 3가지 색깔의 종이가 3장 놓여있어요. 파란색, 초록색, 주황색. 이렇게 총 9장이 있네요. 이 종이에 당신에게 소중한 것들을 적어볼 예정이에요. 



  먼저 내 삶에서 소중한 사람과 동물 셋을 떠올려볼게요. 그리고 파란색 종이에 각각 그 세 대상의 이름을 적어주세요. 스르륵 스쳐 지나가는 몇몇이 있을 수 있겠지요. 내가 살아가는 데에 가장 큰 원동력이 되는 나의 반려동물이 생각날 수 있겠고요. 최근 몸이 편치 않아 병원에 다니고 계시는 가까운 사람이 떠오를 수도 있겠지요. 당신의 마음속 가장 큰 방을 차지하고 있는 대상을 셋 적어주세요. 



  다음으로, 내가 일상에서 좋아하는 활동과 취미 3가지를 상상해볼게요.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가는 장소, 고된 한 주를 위로하는 요리, 자기 전에 항상 찾아보는 영상, 언제 나올까 기대하는 작가의 신작 등이 생각날 수 있겠지요. 당신이 시간을 두고 기쁜 마음으로 찾아서 행할 수 있는 것들을 상상해볼게요. 마음에 드는 것들이 떠올랐나요? 그것들을 초록색 종이 3장에 각각 적어주세요. 



  마지막으로, 나는 미래에 이런 모습으로 살아야지 꿈꾸는 모습이 있다면 이를 떠올려 보세요. 그때의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나요? 어떤 옷을 입고 있고, 그 옷은 마음에 드는지 잠깐 마음의 눈으로 살펴볼게요. 미래의 당신이 있는 공간의 분위기는 어떤지도 궁금하네요. 주변에는 어떤 사람들과 함께 있나요? 무엇을 하면서 지내고 있는지, 스스로에 대해서는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부분을 만족스러워하고 어떤 삶의 과제를 지니고 있는지도 천천히 살펴볼게요. 미래의 나는 어떤 모습일지 주황색 종이 3장에 각각 적어줍니다. 


  당신의 삶에서 소중한 것들이 적혀있는 아주 귀한 9장의 종이네요. 그 종이들을 한 번, 그리고 또다시 한번 더 접은 다음 조그마한 네모 상자 안에 넣을게요. 왼 손을 그 박스에 넣어 휘적휘적하다가 하나의 종이를 골라 볼게요. 그런 다음에 이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어느 날, 하루아침에 이 종이에 적힌 무언가를 내 삶 속에서 영원히 잃어버려 다시는 되찾을 수 없다면 어떨 것 같나요? 


  그 순간 바로 떠오르는 몸의 느낌, 아주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머릿속의 생각, 느껴지는 마음속의 감정은 어떤가요? 





  '9개 중에서 왜 하필이게?'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을 수도 있고요, 혹은 '아, 그나마 이거라서 다행이다'라는 안도감이 느껴졌을 수도 있고요. 그렇다면 같은 색 중 다른 종이를 골랐다면, 아니 아예 다른 색의 종이를 골랐다면 마음이 더 가벼웠을까요? 더 마음이 무거웠을까요? 아예 이 상상 자체에 몰입이 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아니 뭐 이런 상상을 하라는 거야'라는 불편감 역시 충분히 느껴질 수 있겠지요. 


  우리 삶에서 소중하고 값진 것들의 무게는 측정하기 어렵지요. 그것이 값지면 값질수록 이미 내 일부가 되어 그것 없는 삶 역시 잘 상상되지 않고요. 어찌 보면 내게 소중한 대상이 많아진다는 건 나를 두렵게 만들 수도 있어요. 삶에서 나에게 아주 값진 것은, 달리 말하면 나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는 것으로 나에게 아주 취약한 부분이 되기도 하니까요. 그래서 그들의 무게를 미약하게나마 느껴보기 위해 영영 내가 이것들을 잃게 된다면 어떨지 상상을 해보려 하지만, 상상하기 어렵죠.  




  이런 상상을 한다고 상실에 대한, 그리고 상실을 보듬는 애도 과정에 대한 예상 연습이 되기는 어려울 거예요. 미리 상상한다고 해서 앞으로 겪을 상실이 덜 아파지는 것도 아니고요. 다만, 이렇듯 상실을 마주하고 이를 애도하는 과정은 참 어려운 일이라 내가 힘들어 할 수 있다는 걸 인정해주는 마음을 갖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몰라요. 왜 빨리 나아지지 못하지? 왜 계속 멈춰서 주저앉아있지? 때로는 상실과 애도의 과정에서 나를 책망하고 답답해하는 마음이 생길 수도 있지요. 그저 바라는 건, 우리가 때로는 아파야 할 그 시기에 필요한 만큼 아파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닐 수 있길 기도하는 거지요. 제 때 제대로 아파하는 시기를 보낸다는 건, 우리가 삶으로부터 도망가지 않고 명료하게 살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과업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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